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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Jun 12. 2024

디지털 키즈의 탄생

점진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었던 80년대 정보화의 초상

글을 시작하며..


02학번으로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들었던 수업이 기억이 난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주제로 한 강의였다. 책머리에는 그 유명한 한 문장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문장이 박혀있었다. 고등학교까지 국사 책을 달달 외워서 입시를 통과한 사람에게 일종의 기념비로 주어진 강의랄까. 풋내 나는 인문 대학 1학년 새내기에게 '역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는 명제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면 동네 할머니나 우리 엄마가 글을 써도 그게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단다. 그것이 꼭 글이어야 하는가? 녹취는 안되나? 비디오카메라는? 주제가 꼭 정치적이고 '쓸모 있어야'하는가? 그럴 필요도 없단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20년 넘게 지나고 녹슬어온 새로운 역사 기록의 개념이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은 것들의 역사. 민중들의 역사. 여성사, 노동자들의 역사, 버려지고 잊힌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역사 찾기 이런 식의 주제는 대학 시절 내내 여러 카테고리로 변주되어 각종 토론과 글쓰기, 강의, 언론 형태로 이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일종의 대학생들이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 대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의 의미가 진짜로 시작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 돈도 없고 여러 가지 사정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맞본 학문의 뜻과 의미를 진짜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학교 밖에서는 민중사와 여성사, 노동운동사라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도식을 배우고 학교 안에서는 고전텍스트를 읽다가 의미를 전혀 찾지 못하고 졸업 후 취업의 세계로 내던져졌다. 그렇게 20년이 흐르고 삶에 치이는 중년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은 대학 1학년 때 첫 강의에서 들었던

 '역사는 기록자의 관점에서 바뀔 수 있다'는 명제였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가 산 세대와 역사의 증언자가 될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 내가 특별하고 재주가 많아서 그런가?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시대에 비춰 시대적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는 가정 아래서 말이다. 내가 보고 체험한 것들을 보고 증언할 수 있는 대상자 중에 하나라는 의미에서. 100년 후에 내가 싸이월드에 쓰고 블로그에 쓰고 브런치에 쓴 글이 사료로 연구될 가능성이 있는가? 그것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 학자의 판단아래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 중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안사를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면 나는 내 인생의 무엇을 자료로 남길 것인가. 나는 평범한 내 인생에서 한 가지 맥락을 찾아냈다. 그것은 나의 탄생시작과  디지털 시대가 같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전문학자는 아님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옆에서 생활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디지털 전자 기기들의 출연이 어느 시점에 '시작'되었음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내 글이 끝날 즈음에는 옆에 있는 디지털 기기를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기를. 어디까지나 그것이 내 욕심이자 목표이다.

디지털 세상은 자연적으로 뿌리내리고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공기나 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개발되고 진화하는 '인위적인' 것임에도 우리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여기면서 사는 것은 왜일까?


디지털 키즈의 탄생- 산업화와 정보화의 갈림길에서 


나는 1982년 생이다. 이 해는 스티브 잡스가 처음으로 매킨토시를(애플사의 첫 개인 컴퓨터 모델)을 기획하고 제작히던 무렵이기도 하다. IBM에서는 1981년 8월 개인 PC를 출시했다. 컴퓨터가 처음으로 개인 소유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80년대 아빠는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전산실에서 근무한 사람이었다. 개인 PC라는 신 문물이 막 나오던 시대 아직 한국에는 PC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빠는 회사의 대형 컴퓨터 실에서 일했다. 대학을 물리학과로 졸업한 아빠는 졸업 후 직장을 찾다가 컴퓨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접하고 '앞으로 내가 일할 수 있는 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방까지 가서 직장을 구하고 그곳까지 엄마를 데리고 와 가정을 이루고 나와 오빠를 낳았다. 회사 사람들이 모여 살던 사택 단지 안에 사람들이 만나면 약간 낮추는 말처럼 '전산쟁이'라는 말을 쓰곤 했는데, 나에게는 말이 아빠와 회사와 아빠와 같이 다니는 많은 들에 대한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같다. 아빠는 어딘가 멋있어 보였고, 가끔 가져오는 전산용지들도 신기했고, 아빠의 서재에 있는 미래학자 초상그려진 책들은 어딘가 '있어 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제목들은.. 제3의 물결.. 미래의 초상.. 권력이동.. 1984년 이런 종류의 책들이었다. 새로운 세상과 미래에 대한 장밋빛 창을 보여주는 같은 분위기의 책들이었다.


미래를 쫓는 사람과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


앞으로도 종종 말하겠지만 2024년을 사는 우리조차도 정보격차가 작은 나라와 상대적으로 다른 현실 속에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모든 문명과 세계가 같은 수준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그 자신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심지어 북한 사람들 조차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 상대적 격차라는 것이 얼마나 자존감을 좌우하는 가라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초반 개인 컴퓨터 보급붐이 불었던 시대를 떠올려 보면 그 시점에서도 우리는 어렴풋이 '오지 않은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것과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콤플렉스 속에 살았다. 그건 개인도 마찬가지여서 지금도 아무 상관없는 유통점 광고에서도 AI, 인공지능 이런 말을 수시로 쓰는 것처럼 뭔가 미래, 첨단, 과학 이런 단어면 어떤 것이든 붙여 이미지를 포장했다. 사람들은 뭔가 자기가 구시대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쓰고 새로운 것에 심하게 목말라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누구도 꿈꾸는 미래의 지점에 가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과학이 발전한 세계를 굳이 표현하자면 미국이나 일본이 그에 가까웠으나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미국이 어떤지 일본이 어떤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그때 사람들 조차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에 정확히 발을 디디고 사는 게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 조차 자신들은 항상 자신들이 '최신'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늦었는가? 늘 떠올리고 물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항상 썼던 말이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정보화 세계에 완전히 진입하지 않았다. 지금 못하는 기술은 언젠가 마침내 실현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을 실현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소득 경제 기술 수준이 아직 도달하지 못해서 이다'라는 말의 종류였던 것 같다. 숫자로 표기된 물리적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찬란하게 꽃필 기술 발전의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넋두리이자, 80년대와 90년대 개인들의 한탄 같은 것이었다.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를 썼던 시대 작가조차도 우연히 시대에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면이 분명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기술적 한계에 막힌 어느 지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했다는 것을 속에서 느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끌어당기려고,  시대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SF 판타지 같은 소설들을 계속 토해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1980년대 스티브 잡스나 그보다 훨씬 멀어진 곳에 사는 평범한 전산실 직원이었던 아빠조차에게도 '컴퓨터가 움직이는 세계'라는 변화의 물결과 시대의 불확실성이 보였던 것이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수로 가득한 이진법 기계들의 세계.. 그러나 현실적으로 꽉 막힌 냉전세계,  그러나 닿을 수 없는 현실을 날마다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계속 콤플렉스만 느끼면서 미래를 쫓는 사람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무언가 결단을 하고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가 아닌 가 싶다.  


디지털 세계가 아빠의 세계에서 시작되었지만, 30년이 흘러 오빠와 나의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구현되었다. 그렇다면 2014년에 태어난 내 딸들은  21세기를 넘어 22세기에 무엇을 수 있을까. 미래에 앞서 지금

시점에서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과거이다. 우리가 지금 본 하늘의 별이 이미 과거에 사라진 별이듯. 저 별 너머에서는 우리를 제 3자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 아닐까.


*E.H 카는 내가 태어난 1982년 사망했다. 그러나 82년 생인 내가 그의 책을 읽은 것은 사후 20년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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