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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Aug 05. 2024

언어치료실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문과 엄마의 둘째 아이 난독증 치료기 1.

세상에서 제일 멀고 긴 거리. 마음의 거리


6월 무렵 둘째 아이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에 내가 담임선생님께 난독증(읽기 장애) 치료 바우처에 대해 문의를 했는데, 신청과 관련해서 답변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알아보니 교육청에서 난독증 바우처를 쓸 수는 있는데요, 우리 지역에는 없고 수원이나 동탄까지

가야 한다고 하네요. 서류를 지원해도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를 데리고 타 지역까지 수업받으러 가실 수 있겠어요?" 

직접 데리고 갈 수 있겠냐는 선생님의 질문은 생각보다 무겁게 들렸다. 자차로는 30분 정도의 거리지만 대중교통이라고는 거의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인데 거기까지 매주 예약하고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받을 여건이 되냐는 뜻이었다. 선생님 말로는 아주 심각한 아이 몇 명만 될지 모르겠고, 둘째가 거기에 해당되는지 알 수 없다고 일단 신청하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리고 7월 말 방학 전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던 날, 선생님께선 아무래도 안된 것 같으니 방학 동안 운영하는

학교 내 계절학기 기초학력 수업 반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것을 권유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로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난독증 바우처 대상자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가방에는 공문과 신청서 2장이 들어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어머니께서 센터를 알아보시고 예약하셔서 진행하시면 됩니다'라고 간결하게 적혀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이 메시지와 함께 공문에는 수원과 동탄에 있는 30개가 넘는 언어치료센터 목록이 적혀있었다.

공문을 받은 날, 아이들은 방학식 전날이었고 가족들은 휴가계획에 들떠 있는 시점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수원 지리도 잘 모르고, 어떤 센터가 좋은지도 모르지만 공문에 쓰여 있는 12월 말까지 남편이 쉬는 날을 빌어  20회가 되는 바우처를 쓰자면 한 시라도 빨리 센터에 예약을 해야 했다. 뭘 하더라도 일단 줄부터 서는 것이 한국 사람 아닌가. 

일정을 잡으면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가족 여름휴가기간에 센터를 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2학기 까지는 고작 3주의 시간정도라는 생각이 들자 조급해졌다. 7월 말 휴가기간 시작인 데다가 주말만 되는 빡빡한 조건 속에 예약전화를 돌리면서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반이었는데, 다행히도 한 곳에서 상담사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받아주셨다. 망설이는 나보다 선생님이 적극적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센터에 전화해 보니 복지카드가 나와야 예약이 된다 했다. 교육청의 발급은 생각보다 느리고 우리의 사정을 알알 아주 지도 않는다. 그래도 상담사 선생님께서 첫 주에 검사를 받을 수 있게 진행해 보게 교육청과 연락해 보겠다는 말은 희망적이었다.

 8월 첫째 주, 주말이 다가올 때까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검사여부는 주말 즈음이 되어서야 확실해졌다. 복지 카드 발급이 늦춰졌지만, 그래도 검사를 해주시겠다는 상담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일단 치료 센터로 온 가족이 떠났다. 남들이 워터파크 가는 때에 아이와 남편까지 데리고 치료실에 간다는 것이 눈치 보였지만 다행히도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막상 놀러 가자 마음먹으면 2시간 넘는 강원도까지도 가는 것도 예삿일이지만, 30분 거리에 있는 치료실이

이렇게 멀고 긴 길이라고 느껴진 것은 마음의 무게 때문 아닐까 싶었다. 둘째 아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머리로는 다 알지 못해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기초가 쉽다는 생각의 틀을 깨야


나는 어린 시절 한글을 어떻게 배웠던가. 생각해 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남들 배우는 방식으로

일일 학습지도 조금 하고, 7살 즈음에는 엄마가 성당모임 할 때 레지오 책에 삐뚤빼뚤 '엄마 사랑해요'라는 

글씨도 써보고, 오빠 교과서도 읽어보고 집에 있는 동화책도 읽고 하면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특별히 집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없다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익혀나갔던 식이었다. 산수(지금의 수학)는 좀 느린 편이었지만 한글은 빠르편이어서 2학년쯤에는 웬만큼 읽고 쓰기가 다 가능했다. 3학년에는 동화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고, 영어를 시작했는데 자동차나 간판 등을 지나가면서 보고 읽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90년대의 흔한 초등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엄마가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 것은 크게 없었다.

그래서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덜컥 걱정이 들었던 것은 애가 엄마를 닮아서 수학을 못하면 어쩌지 이 생각이었지, 국어를 그것도 한글을 못 읽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 한국에서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8살 이전에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익혀가는 생활언어에 가까운 것이니까. 아이가 때가 되면 걷고 말하고, 뛰고, 이가 나고, 기저귀를 떼는 것처럼 발달이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가 되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발달이란 잘 되면 한 없이 쉬운 것이지만, 안되면 한 없이 어려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어떤 엄마들은 아이를 셋 이상 낳았으면서도, 어떻게 키웠냐는 질문에는 '그냥 키웠어요, 지들이 알아서 챙겨 먹고 알아서 하더라고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둘키우면서 이 말은 마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우수학생의 대답과 거의 비슷한 급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결코 그냥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아이들의 발달은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지금껏 속한 번 섞이지 않고 밥때가 되면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모든 지 알아서 잘하고 불평도 잘 안 하는 순둥순둥한 둘째라도 스스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간이 온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오지 않는다. 변이는 항상 존재한다


나는 모든 것을 내 기준이 아니라, 학습자(둘째 아이)의 시선으로 돌려서 다시 바라봐야 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시각을 바꾸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시작해야 풀어야 했다. 그러자 결론이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한글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어린 시절 그 시대 분위기에서 한글을 쉽게 떼었던 것과 지금 세상이 똑같지 않다는 것 말이다.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운 방식과 내가 딸을 키운 것이 다르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한글이 쉽다 쉽다는 말을 너무 듣고 자란 덕에 초기 언어학습의 쳬계성을 모르고 시작했다는 것을. 오히려 주변에 넘쳐나는 책들이 아이에게 흥미를 주기보다 부담만 느끼게 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의 환경이 너무나 미디어노출이 많다는 것을. 언어발달의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코로나를 겪어왔음을. 어쩌면 둘째 아이가 문과인 나와 닮지 않은 아이일 수도. 느린 학습자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모든 추론은 내 자식은 나를 가장 닮았고,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식의 가정아래서는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어떤 기자가 외국인 학당에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에게 답을 정해놓고 한글이 쉽냐고 물었다. 학생은 "한글은 쉽죠.. 중국어보다는.. 그런데 힘들어요"라고 대답했다. 많은 의미를 담은 채 말이다.

그래서 큰 아이가 나에게 말했나 보다. "엄마는 뭘 가르칠 때, 제발 쉽다는 말 좀 하지 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야. 그게 쉬워? 엄마는 엄마한테나 쉽지.. 나한테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라고 아주 따끔하게

말대꾸를 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래.. 어려울 수 있다. 힘들 수 있다.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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