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좋은 것을 담았고 그것들을 기억해 내기 위해 내보냈다.
그래야 새것이 담겼다. 비워냄은 늘 해내야 하는 과제 같았다. 담고 싶다면 비워야 했다. 물리적 비움의 행위가 감정의 비움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감정을 덜어내었더니 무언가를 비워내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 어떤 공간에나마 부유하고 있을 나의 글들을 한 데에 담아두는 것이 내겐 무척이나 이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쓰기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떠올려 간신히 끄적거린 날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나의 머릿속이 비워졌다. 그리고 삼사십여분을 달리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노트를 꺼낸다.
글은 늘 그런 것이었다. 나의 불순한 감정이 되기도, 기쁨의 노래가 되기도, 때로는 절제된 시와 음악이 되기도 했고 부족함을 숨기려 멋 부림이 되기도 했다. 현실에서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나의 글이 대신해 줬다. 그때 나를 살리던 글쓰기는 가끔 타인을 살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꿈에서 보았던 어떤 것을 그려내기도 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스무 살 시절의 한 여학생을 떠올리기도 했다. 글을 쓰는 동안 어지럽게 춤추던 나의 상상과 감정들은 오늘의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마치 소원처럼 들어주었다.
내가 집중했던 것은, 언제나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었다. 기억에서 꺼내 글로 내보내고는 다시 나는, 나를 비웠다. 그래야 치유가 되고 상처가 아물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글이 될만한 것을 쓸 수 없어 그리운 이름으로 가득 채우거나, 내가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던 몇 문장을 필사하거나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의 손이 무한의 자유를 만나던 순간 오늘의 아픔과 두려움, 괴로움은 대충 적절함으로 포장된 언어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갔다. 아무도 봐주지 않던 순간에도 나 자신은 흡족했다. 운이 좋던 초봄 어느 날엔 감사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쓸 수 있어 감사했고 그렇게 써낸 글을 다시 보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어 고마웠다. 나로 살고 싶던 세상에서 진짜의 내가 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을 매 순간 맞이하며 나의 작은 그릇을 원망하기도 했고 그 원망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기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내게 글쓰기란 참다운 치료였다.
쓰기 위해 얼마간은 최면에 걸린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나 자신이 연필 아래로 떨어지던 그 감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고선 원하는 것들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불과 1분 전에 떠올랐는데 막상 쓰려하니 사라지고 지워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그 감정이 되어야 했고 느낌이 되어야 했으며 제한된 몇 마디 말로라도 표현해야 했던 어떤 기분이어야 했다. 그 찰나에 원래의 것은 또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완벽하게 기억해내지 못했던 순간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되어버렸고 아주 새로운 것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이라도 잡아내어 글이 될 수 있었음에 안도하면서도 놓쳐버린 원래의 것에 대한 그리움을 비워낼 수는 없었다. 채우고 또 비워내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며 흘러간 시간들로 나는 치유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문장들을 눈을 감고 써 내려가는 기행을 반복하며 행복했다. 농익은 글을 써낼 수 없으면서도 나의 세계 안에서 만큼은 내가 전부가 되는 날이 많았다. 썩 괜찮은 재주가 되어주길 기대하며,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살리는 글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나는 나를 치유하는 이 과정을 더욱 사랑하기도 마음먹는다. 그럼에도 내게 많은 순간 고통을 안겨줄 이 과정의 작업들, 이제는 내가 널 살리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