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기간은 묵언 수행처럼 은둔에 가까운 날들이었다. 낚시와 잡념, 그리고 브런치에서 “그냥잡담”으로 백수의 시간을 지내왔다.
명예퇴직 이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 일하게 된 곳도 그중 하나에 들어간다. 호텔에서 자보기는 했어도 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긴 자신의 예상대로 입맛에 맞게 굴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매일 건강식을 챙겨 먹는 사람도 어느 날 옥상에서 떨어진 화분에 비명횡사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다시 세상 속으로, 일하게 된 곳은 지세포 근방에 있는 호텔이다. 출근 거리가 집에서 15분 정도로 가깝다. 경치가 끝내주는 곳이다. 호텔에 해안가 산책로와 전망대가 있다. 바로 옆에 와현 해수욕장이 있고 외도와 해금강으로 가는 선착장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업했다.
연금수급자라 생계에 큰 압박을 받는 상황은 아니지만, 무질서한 생활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생활을 통해 다시 나 자신을 가다듬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수행자들은 수양을 위해 은둔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은둔에서 나왔다.
그러나 나 또한 굳건한 사람이 아니기에 언제 마음이 변해서 다시 은둔을 그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수행자가 아닌 이상 일관된 마음을 간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중생”인가 보다. 중생은 평범한 중간자리다. 상품도 하품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두루뭉술한 위치.
류시화 시인이 그 심리를 제대로 짚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변덕이 죽 끓듯, 몸 가는 곳에 마음 따르고 마음 가는 곳에 몸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변덕만큼이나 행복 조건도 상황에 따라 바뀐다.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잃은 사람은 도박하기 전의 상태가 “행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반면에 아무런 사고 없이 재산을 잃지 않았음에도 행복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그것을 “안나카레니나 법칙”에서 이해하곤 한다. 이 법칙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시작되는 소설의 첫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잘되는 집안은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안 되는 집안은 어떤 구실이든 천차만별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안나카레니나는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성품을 지닌 여성으로 정치가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녀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공허함이 있었고 결국 불륜에 빠지게 된다. 전 남편과의 이혼이 이루어지지 않고 애인과의 갈등도 심해지자 끝내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가진 그녀였지만 결과는 파국이었다.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면 흥미를 잃는 법이다. 진시황은 황제가 되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황제를 넘어 영생하기를 원했다. 만일 그가 불로초를 얻어 영생했다면 만족했을까? 그러나 그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생 이상의 무엇인가를 또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마지노선이라는 것이 없다.
안나카레니나는 그 덫에 빠진 대표적인 사례다. 그녀의 생활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수준이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만족을 찾아 헤맸다. 진시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마지노선이 없을 때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더 많은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계속해서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을 느끼게 된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에서 행복이 시작된다고 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뿐이다. 곧 “Mind Control”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철저하게 외면하라! 남이 로또 1등에 당첨되든, 명품을 사든, 고급 외제 차를 몰고 다니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외부의 상황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을 의식할수록 심리적인 결핍만 늘어난다.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개처럼 뒹굴며 살았지만, 그를 부러워했던 건 다름 아닌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마치 자기가 “神”이라도 된 것인 양 거침없는 디오게네스 자유정신에 알렉산더는 질투를 느꼈던 모양이다.
마음에 담아 둔 티베트 속담이 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나이 50에 명예퇴직하고 사업실패, 이혼, 떠돌이로 전전긍긍했던 지난날들,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걱정을 이삿짐처럼 이고 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모든 것이 홀가분하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살아갈 뿐이다. 인생 살아가는데 철학적인 고민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박테리아나 인간이나 세포분열 메커니즘은 똑같다. 그 신념을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생 그냥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로써, 그냥 사는 데까지 사는 것이다. 사는 방식에 잔머리 굴릴 필요까지는 없다. 어떻게 살든 박테리아나 인간이나 다시 유기물로 돌아가는 결과는 다르지 않다.
유기체 최고의 행복, 고통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자연의 양심을 잃지 않는 것, 자연의 본성에 거슬리지 않고 더불어 사는 것,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듯 부지런히 사랑하는 것. -굴비-』
그 신념 그대로, 고통 없이 잘 먹기 위해 나는 썩은 이를 모두 뽑고 임플란트 시술 중이다. 치아가 하나도 없는 지금, 아구 상태가 말이 아니다.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격언이 실감 난다.
썩은 이는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행복은 걱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없애는 것에 있다. 돈을 벌고 지식을 쌓는 이유도 앞으로 있을지 모를 걱정거리를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것을 넘어서 샤넬이나 람보르기니가 없는 것에 결핍을 느낀다면, 진시황 심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유기체 최고의 행복! 걱정거리 없고 고통 없이 잘 먹고사는 것! 그러나 이 마지노선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느새 입사한 지 6개월이 지났다. 낙엽 지던 때 면접을 봤는데 지금은 벚꽃 지는 계절이다.
호텔 전망대에 서면 해금강과 외도가 보인다. 전망대에서 선착장을 오가는 배를 볼 때마다 시간의 화살, 그 속도감을 느끼곤 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무렵, 서울에서 외도로 가족여행 왔던 적이 있었다. 바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지만, 초등생이었던 코흘리개는 어느새 서른이 되었다. 나 또한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어 있다. 염색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제는 세월을 거슬러 살지 않기로 했다.
외도(外島). 홀로 떨어져 있는 섬, 한때 은둔의 섬이었던 이곳은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은둔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셈이다. 세상 밖에서 사람과 뒤섞이게 되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소설이 된다.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소설도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그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플롯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살아가는데 하나의 이니셔티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작가의 손끝에서 운명이 결정된다. 작가의 구상에 따라 주인공은 안락한 환경에 있거나 고난을 겪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상황이 어떻든 소설 속 주인공은 작가에게 반기를 들거나 항변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가가 수정하거나 캐릭터를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소설의 작가는 다름 아닌 자신의 의지(mind)다. 플롯을 짜고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작업은 작가의 몫이다. 그렇게 하나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 우리는 그것을 “인생” 혹은 “운명”이라고 부른다.
홀로 와서 홀로 간다는 점에서, “인생”은 표면적으로 외도(外島)와 모양이 닮아있다. 부모 자식이나 부부라 할지라도 운명을 대신 겪어주거나 빌려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누구나 은둔(무덤)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생명은 분자배열의 특별한 상태일 뿐이다. 그것이 안개처럼 흩어져 평범해질 때, 물리적으로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생물과 무생물은 소설과 잡담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특별한 것이고 잡담은 평범한 것이다. 소설은 기억되지만 잡담은 이내 잊힌다.
가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중에 죽어서 무덤 속에 있을 때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육체가 없다 해도 흩어진 생의 입자들은 공간의 지층, 시간의 퇴적층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훗날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죽어서는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도 세상을 떠나온 처지이기에 살았던 날의 지층, 시간의 퇴적층을 더듬어보고 싶을지 누가 알겠는가?
"인생=소설"이 진실이라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장 한 줄 생산을 위해 고심하는 작가의 마음처럼, 하루의 삶은 인생의 소설에서 한 줄 문장과도 같다. 내가 은둔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이유도 그 한 줄 쓰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