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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Oct 26. 2022

31. 어떻게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

차별이 없는 곳이 있기나 할까?

내가 9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호주는 4학기제다) 학교에서 집으로 문서가 하나 온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지금의 성적을 학년말까지 유지하면 내년에 진학 예정인 고등학교(10학년)의 1년 치 학비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장학금을 제안받은 것이었다. 당시 학비가 1년에 3천만 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파격적인 제안이었고 놓치면 안 되는 절실한 상황이었다.


내가 다니 학교에서는 중학교 과정까지는 Literacy & Numeracy로 통합수업을 했다. Literacy는 언어&사회 과목, Numeracy는 수학&과학 과목 위주였고 요즘 말하는 프로젝트식의 수업이었다. 학기마다 테마가 있고, 그 테마는 대주제, 소주제 등으로 나뉘고 주제마다 과제가 있는 방식. 심지어 우리 학교는 교과서도 없어서 모두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수업했다.


예를 들어 한 학기는 세계 4대 문명이 테마라면, 4대 문명에 대한 수업을 하고 일차적인 자료조사(도서관+구글링)를 토대로 리포트를 제출한다. 그 후에 각자 원하는 문명(ex. 이집트)을 선택하고 그중 세부 주제(ex. 의복)를 골라 보다 면밀히 조사하고 더 깊이 있는 리포트를 추가로 제출하는 방식이다. 두 개의 리포트를 합하면 대락 20장 내외의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선생님은 개별적으로 자료조사 결과, 에세이 아웃라인, 에세이 초안, 에세이 최종본까지 모두 피드백을 주었고 제출하는 모든 것은 평가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기 말이 되면 Exposition Night(설명회)를 열어 가족을 초청했다. 4대 문명이 테마라면 A & B반에는 인더스, C & D반에는 이집트, E & F반에는 황하, G 반에는 메소포타미아와 같이 대주제 별로 나누고 각 반에서는 세부 주제에 맞춘 동선을 짜서 부스를 배치했다. 행사 당일에는 리허설 시간이 따로 있어서, 학생들이 서로 다른 반까지 방문해서 모든 발표를 미리 보며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저녁시간이 되고 부모님이 하나둘씩 도착하면 각자의 부스 앞에 서서 직접 만든 PPT, 포스터 등을 이용해 세부 주제를 소개하고, MS퍼블리셔를 이용해 직접 제작한 리플릿, 브로셔 및 각종 자료들을 배포했고 필요에 따라 직접 만든 의복, 음식 등을 체험시켜주기도 했고 이는 모두 평가대상이었다.


학생들은 큰 테마에 대한 넓은 지식을 쌓고, 대주제를 조사하며 머릿속에 카테고라이징을 할 수 있고 소주제를 조사하며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으며 친구들의 소주제를 관람하며 최대한 다양한 내용을 학습할 수 있는… 여러모로 유익한 방식의 수업이었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최고점을 받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내 상황에서는 상당히, 아니 굉장히 부담스러운 과정이었다. 차라리 중간, 기말 딱 두 번 시험 보는 과정이 더 쉬웠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영어권에서 몇 년째 교육받고 있다고 해도 모국어가 아닌 이상 현지 아이들에 비해 문체가 단순할 수밖에 없었고 문법 실수가 다발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아이들이 2주 동안 에세이 하나를 쓸 때 나는 에세이를 세 번을 제출해서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 받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9학년 때의 내 성적은 체육에서 A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4학기 내내 전체 과목 A+였다. (럭비는 너무 힘들었다…) 그 와중에 주말마다 필드하키 경기를 나갔고 학교에서 하는 두 개의 오케스트라에 퍼스트 클라리넷으로 참여했다. 9학년 성적은 나에게만큼은 정말 죽어라 만든 성적이었다.


“It is regretful to inform Miss Choi that…” (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안타깝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올 A+가 아니니까 할 말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쉬웠지만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소식을 듣고는 헐레벌떡 달려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This is outrageous! Ashley, this is not acceptable.” (너무 충격적인 일이야! 애슐리,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선생님의 격분하신 모습을 보고는 괜히 더 의기소침해졌다. 모두들 많이 기대를 했던 것 같았다.


“Well, it’s my fault I couldn’t get it. I’m sorry to disappoint you…” (못 받은 건 제 잘못이죠.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No! There was a tie between you and another student but the school has decided to give the scholarship to the other student without any clear and legitimate explanation or justification. I’m must make an objection. We should at least know why we failed because… there seems to be some kind of dubious business going on.” (아니야! 너랑 다른 아이 한 명이 동점이었는데 학교 측에서는 투명하고 타당한 설명이나 이유 없이 다른 아이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한 거야. 난 이의 제기를 할 거야. 적어도 왜 떨어졌는지는 알아야 돼. 왠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거든.)


선생님은 그 후에도 중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달려가서 보고를 했고 교장선생님은 헤드마스터(전체 학교 교장)에게 가서 이의 제기를 하셨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은 백발의 신사 같던 분이셨는데, 그분의 호출을 받고 교장실에 찾아가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Apparently… the school’s decision was to give scholarship to the Australian student. Although it wasn’t the criteria but that was the only reason you were not selected. It could be because international student’s school fee is much higher or it could be because they believe that they have to support an Australian over foreign students… either way, I concede that it is clearly a discrimination. I’m sorry to tell you that I… can’t change the decision.” (알아보니…. 학교는 호주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더구나. 그게 평가기준은 아니었지만, 그게 네가 선택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였어. 어쩌면 외국인 학생 학비가 더 높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외국인보다는 호주인을 지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였을 수도 있고… 둘 중 어느 것이 든 간에 차별이 있었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결과를 바꾸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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