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는 스테이크
2021년 8월 말 몰타에 입국한 이후 6개월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고 복잡하고 어려웠던 비자 문제도 잘 마무리되었다. 2월 말 몰타 카니발 축제 기간에 연휴가 생겨 아이들과 몰타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몰타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이탈리아로 결정했다. 일단 로마에 가서 바티칸, 콜로세움을 보고 피렌체로 이동해 우피치 미술관 투어 후 피사에 들러 피사의 사탑을 보고 다시 몰타로 돌아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처음 계획한 일정은 5박 6일이었다. 하지만 늘 여행에는 변수가 생기는 법. 비행기도 바꾸고 기차표도 바꿔가며 했던 이탈리아 여행은 결국 로마 3박, 피렌체 2박, 베네치아 2박 그리고 볼로냐 1박 해서 총 8박 9일의 여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이들도 나도 이탈리아는 처음이라 긴장했다. 워낙 소매치기와 홈리스가 많다는 정보에 마음을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아들이 둘 있다. 아이들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한 명은 나의 앞에서 한 명은 내 뒤에 서서 가방과 나를 든든하게 지켜 주었다. 하지만 소매치기는 언제 어디에서든 수시로 공격을 했다. 결국 내가 맨 가방 지퍼가 두 번이나 열리고 말았다. 다행히 훔쳐간 물건은 없었다. 왜냐하면 가방에는 값비싼 물건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매치기가 훔쳐 가더라도 여행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물건만 넣어두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가방이 열린 사실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본인들이 잘 지킨다며 자신했는데 어느 틈새 가방이 열린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것은 3월 초순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최근 한국의 3월 날씨를 떠올려보면 눈 뜨자마자 미세먼지가 얼마나 심한 지부터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뽀얀 미세먼지에 갇힌 한국과 너무나 상반되는 로마의 하늘은 참 푸르고 맑았다. 로마의 날씨에 대한 감탄이 사라지기도 전에 곳곳에 있는 노숙자와 지저분한 낙서에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많은 관광객으로 몸살은 앓았던 로마는 코로나로 인해 조금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로마에서 첫날 일정은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바티칸 투어를 했고, 다음날은 판테온과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에 들렀다. 하나같이 책 속에서만 보던 유적지를 눈으로 보는 신기함에 아이들도 나도 '와' '대박'같은 감탄사가 연거푸 나왔다. 마흔둘에 보는 콜로세움과 열두 살에 보는 콜로세움의 첫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아이의 눈이 커질 때마다 나의 미소는 번졌다. 우리가 마주한 로마는 유럽여행의 시작과 끝인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었고 오래된 유적지는 현대 문명과 어긋남이 없이 조화로웠다. 로마는 만약 초등학생과 유럽여행을 떠난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도시라고 감히 추천해 본다. 하루 삼만 보씩 걸어 다니다 보면 힘들다며 투덜거릴 법도 한데 아이들은 낮에 본 콜로세움과 밤에 보는 콜로세움이 다르다며 로마여행을 누구보다 만끽했다. 만보기의 숫자가 점점 올라갈수록 몸은 힘들었지만 감동의 지수는 무한대로 상승했던 로마였다.
이상하리만치 로마에서 3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나버렸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는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고 싶은 도시였고 아이들의 필수 답사 코스인 피사의 사탑을 가기 위한 거점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유럽에 오면 어느 나라를 가든 박물관이나 미술관 투어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도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신청해 두었다. 코로나로 인해 로마에서도 우리는 두 번이나 단독 투어를 했는데 피렌체에서도 신청자가 우리뿐이라 본의 아니게 여기서도 단독 투어를 하게 되었다. 원래 단독투어는 비용이 훨씬 비싼데 우리는 코로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미술 작품을 또 다른 재미로 설명해 주는 가이드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아이들은 궁금할 때마다 가이드에게 질문을 했다. 잦은 질문에 귀찮아할 법도 한데 가이드는 항상 웃으며 아이들에게 친절히 답해주셨다. 아는 작품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더 귀를 쫑긋 세웠고 모르는 작품의 설명을 들을 때는 그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려 더 크게 눈을 뜨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3시간이 넘는 우피치 미술관 투어가 끝나자 아이들도 나도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가이드에게 이렇게 힘든 게 맞냐고 물으니 원래 우피치 미술관 투어가 그렇다며 웃으셨다. 새삼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가이드가 대단해 보였다. 뭐든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가이드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미술관을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허기가 지는지 얼른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예약해 둔 피렌체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스테이크 식당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정육점처럼 붉은빛이 도는 전등 아래 엄청난 크기의 생고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니 식탁 위마다 화려한 잔들과 촛불이 눈에 띄었다. 식당을 둘러보니 나만 아이를 동반해서 왔다. 다들 연인 아니면 지인들끼리 식사를 하러 온 듯했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보니 한국에 혼자 있는 남편 생각이 났다. 남편은 와인을 사랑한다. 코스트코에 가면 와인 코너에서만 하루 종일 서 있으라고 해도 있을 사람이다. 그런 남편 없이 홀로 맛있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려니 미안함이 몰려왔다.
이내 우리가 주문한 스테이크와 스파게티가 테이블 위를 채웠다. 나이프와 포크를 잡은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육즙이 사르르 나오는 붉은빛 스테이크의 속살을 한입 먹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스테이크는 모두 가짜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입안에서 고기가 녹는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은 내 인생 최고의 스테이크였다. 소고기를 안 좋아하는 나란 사람이 난생처음 소고기가 맛있구나라고 느끼게 해 준 식당이었다. 그러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남편 생각이 순식간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 여보.’
최고의 반찬은 허기라고 하지만 우리가 먹었던 스테이크는 진심 최고였다. 아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 맛있다고 감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만 덩그러니 차지했다. 언젠가 이 스테이크를 먹으로 남편과 함께 피렌체로 향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턱 양쪽 침샘에서 침이 솟구쳐 저릿저릿한 느낌이 든다. 그립네. 피렌체. 아니 피렌체의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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