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다락방 Dec 02. 2022

새치, 마법의 유효기간은 한 달

삐죽 튀어나온 새치도 나다움의 친구라 여기며...

새치, 마법의 유효기간은 한 달  

   

월말이 되면 늘 반복하는 일이 있다. 아이들 학원비 결제, 가계부 정리, 그리고 새치 염색.

40대 초반에서 중반의 언덕으로 이제 곧 넘어갈 나이인데 성질 급한 나의 새치는 30대 중반부터 자기가 곧 내 머리의 주인공이 될 기세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빠 흰머리를 뽑을 때마다 용돈을 준다고 해서 신나게 뽑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검은 머리 사이로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 톡 뽑으면 아야 하는 맞장구가 좋았는데 어느 순간 흰머리를 다 뽑다가는 아빠가 대머리가 될 것 같은 걱정에 그만해야겠다고 스스로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시절의 아빠 나이가 된 것이다.      


30대의 나는 새치를 뽑았다. 거울을 보면 새치는 나 여기 있지 하면서 검은 머리 사이로 유난히 삐죽 나왔다. 그렇게 새치만 뽑았을 뿐인데 자꾸만 영역 확장하며 뽀얀 머릿속을 보여주더니 결국에는 휑한 정수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밉상 새치 제거가 목적이었는데 덤으로 눈치 없는 탈모가 따라온 것이다. 더 이상 족집게한테 새치 제거 임무를 맡길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새치 염색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염색하다 보니 검은색으로 슬쩍 가려지는 새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자기의 본모습을 조금씩 드러냈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효기간이 석 달쯤 되었는데 어느 순간 두 달로 줄더니 이제는 한 달이 되었다. 주기가 줄어들수록 미용실에 가서 하던 염색을 집에서 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얼룩덜룩하던 염색이 이제는 뒤통수마저 자연스러운 색이 나오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숙련된 노동자의 향기가 나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과연 내가 가리려고 하는 것은 새치일까,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일까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시선일까?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자라는 게 순리인데 그것을 가리고 지운다고 본래의 나는 달라질까? 머리색 하나 바뀔 뿐인데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의 유효기간이 있다. 사람도 나무도 하다못해 연필도. 제 기능을 상실하면 누구든 마지막 종착지에서 만나게 된다. 검은 머리는 제 기능을 상실해서 흰머리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데 잠깐의 마법을 이용해 다시 검은 머리의 역할을 하라고 강요한다 한들 그 생명력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의 역할도 있지만 그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나’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모습을 잃는다면 누군가의 역할은 그저 한순간의 마법일 뿐이다. 힘든 나를 스스로 다독여주고 존중해 주고 아껴주면 본연의 나를 만나게 된다. 거울에 비친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삐죽 튀어나온 새치도 나다움의 친구라 여기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