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움은 지나치면 잔인함이 된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생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p173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굿플레이스>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삶이 끝나고 천국과 지옥 중 한 곳으로 배정받아야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생애에서 했던 행동들이 야기한 결과의 총합, 삶을 지속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의 변화값 그리고 얼마나 규칙을 잘 지켰는지 등 다양한 기준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결론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실은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완전히 나쁜 사람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현실에서 이렇게 사람을 심판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법원일 것이다. 법은 불법과 적법,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선을 제시한다. 그에 따라 피고인은 죄인이 되기도 하고 무고한 시민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법은 우리가 비물질적이라 믿었던 대상들마저도 물질세계로 끌어오는 힘을 가졌다. 눈물과 고통이 계량화하고 사랑까지도 해체하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한 판단들은 쉬이 거두어지지 않는다. 사회 전체에 원칙과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법에 실수나 후회는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을 실행시키는 인간은 이와 다르다. 다른 사람을 심판할 만큼 고결하지도 못하며, 다른 인간 위에 설 자격이 인간은 없다. 인간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다. 법정 위에 선 판사, 피고인, 증인 등의 신분이 그를 온전히 설명하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자 삶의 이면에는 정말 복잡한 사연들이 있다. 특히 법정에 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잘못된 행위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독자나 판단 주체인 판사가 그 상황에 처한다면 다를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은 법정을 찾은 사람들의 이러한 사연을 들어주지 않는다. 사람과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사람, 판사의 몫인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재판해야만 하는 모순 속에서, 그 모순을 견디는 것은 모두 판사의 몫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양형은 매우 정제된 판결문과는 달리 판사가 감상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한다. <어떤 양형 이유>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판사가 인간이기에 겪는 고민들을 털어놓는 책이다.
법과 인간의 간극은 내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똑같은 인간이 없듯, 똑같은 상황, 똑같은 범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로 다가가야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공감하려는 노력도 필요한 이유다. 죄인이 지은 범죄는 처벌해야 하지만, 그 인간을 단죄해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린 범죄 사이로 사람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과연 법관이 추구해야 할 정의는 어떤 것인가? 최선의 답안을 찾기 위해, 죄를 논하는 법정 안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 책이 내놓은 답변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을 세워보지만 그것은 다시 허물어진다. 사람을 한 가지 틀에 담아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물론 이 사실은 오히려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상처와 슬픔을 줄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약한 우리 존재는 다시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람이 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될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인간을 사랑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루어내고자 노력하는 힘, 나는 그것이 인간의 가치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빛나는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판결문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해 일정한 법률효과를 부여할 뿐 모든 감상은 배제하는 글이다. 민사든 형사든 판결문은 매우 엄정한 형식과 표현을 써야 하는데,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형사 판결문의 '양형 이유' 부분이다. 양형 이유는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곳이다.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p6
연대와 동조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공감과 동조, 연대와 실천 그리고 감시와 처벌이 그나마 탐욕에 맞설 수 있는 근사치의 답이 아닐까 싶다. 다행스럽게도 유발 히라리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경쟁자를 공감과 협력으로 물리친 자랑스러운 DNA가 있지 않은가. 공감이 법으로 구현되고 언제나 가장 늦게 공감하는 법률가의 양심에까지 스며든다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P59
그는 고통과 슬픔을 과장하거나 증폭하거나 덧칠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건조하게 보여준다. 남을 웃기려면 내가 웃지 않아야 하고, 울리려면 울지 않아야 한다. 한쪽의 물기가 넘치면 한쪽의 물기는 마른다. 물기 총량의 법칙이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라고 늘 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켄 로치가 보여주는 것은 울고 있는 약자의 단면이 아니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래야 인간이고, 그래야 비로소 동질감을 느끼고 감정이 이입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깊은 고통에 빠질 때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과 슬픔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P115
소동파의 시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정의로움은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 정의는 본질적으로 불의와 부정을 배제한다. 하지만 불의와 부정을 단죄는 해도, 도려내고 폐기해선 안 된다. 거기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P 273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일말의 애정과 연민조차 품고 있지 않다면, 재판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정녕 용인될 수 있겠는가. 법이 곧 정의고, 법이 곧 사랑일 수는 없지만, 법은 정의이면서 사랑일 수 있다.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한 치 설명할 수 없다면, 법은 적어도 사랑에 기반하고, 사랑에 부역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떤 누군가는 반드시 시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양형 이유>_박주영, P 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