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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Mar 05. 2017

생각나무 키우기

1.첫째날

나는 내가 우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잊고 산지 오래다.

지구에 태어난 이후부터 나의 모든기억은 무의식에 갇혔다.

종교는  내가 하늘에서 죄를 지어 지구에 보내졌다고 하기도하고 지구에 살면서 업을 지어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지구인으로서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의 모든 지식의 정보는 지구안에서 살았던 인간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안다고 하는것이 정말 진실성이 있는지는 검증할 수 없다. 특히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보는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의 집합체라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입증 된것이 없다.


그 어느 지식체계도 그것이 확고하다고 하는 절대가치를 지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정보를 지식화하고 이것을 또한 진실화하고 거기다 진리화하기까지 하고있다.

나의 이런 사고유형은 내가 단지 인간의 몸을 가졌고 인간의 문화시스템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닭들에 대한 정보를 알지만 나는 닭이 아니라서 닭의 직접적 검증을 거치지 않아 내가 알고 있는 닭이라는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을 할 재간이 없다. 항상 오차와  오류가 존재한다는 걸 감안해야했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하고 토마토와 콩의 유전조작도 가능하지만 인간이 생명 그 본질의 에너지까지 창조할 수는 없다.

기존의 살아있는 생명체를 가지고 신에게 창조되었다라고 말한다. 일명 신이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이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인간은 무수한 개념을 언어와  문자로 대체했다.

 만물을 하나 하나 개별코드로 만드는것이 언어와 문자만한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라고 해봐야 길다면 길겠지만 무한대의 시간과 견줘보면 새발의 피도 안되는 시간이다.

외계문명,이 말은  지구 외에 은하계를 말한다.여전히 검증되지 않고 의혹이 가득한 외계문명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물질문명 수준 이상의 것이 출현해서 당혹스럽게 하는데 아직도 인간의 기계문명 수준은 아프리카 오지에 코카콜라병이 떨어진 격이다.


나는 오늘도 아프리카 오지 원주민같은 의식으로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 문명을 대한다. 나는 아직도 어느 분야든 내분야가 아니므로 그 물질의 원리와 작동등에 대한 여러 복잡한 체계와 기호는 모른다.


기계를 이용할 메뉴얼만 잘익히려 노력할 뿐이다.

어떤 기계는 메뉴얼만 익히는데 따로 심도있는 교육을 받아야한다. 하물며 그 기계를 어떻게 만들고 작동 원리가 무엇인지 자재는 무엇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공정은 알 재간도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비행기는 잘 탑승하면 되고 조종사는 잘 조종하면 되는것이고, 연필은 잘 쓰면 되고 티비는 리모콘 조절만 잘하면 되는것이다.

 

누군가는 만들어내고 있고 누군가는 소비한다.

그리고 만들면서 동시에 소비하기도 한다.


지구에서의  삶의 질이 과거를  거스러 원시시대 때 보다 더 행복하다 아니다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그때대로 좋았고 팍팍했고 지금은 지금대로 좋지만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유는 인간의 몸은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특히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

내 몸의 체온보다 더 낮은 곳으로 가면 난 견디기 힘들다. 온도가 올라가도 문제다.


인간의 물질문명이란 건 알고보면 인간 몸의 취약성에서 발전된것이다. 춥기 때문에 몸을 지키기 위해 난로가 있다.

원시에는 모닥불이 난방의 전부였다면 지금은 일차적  자연 자원을  전기로 변환하고 전기를 이용할 난방도구를 만들었다. 점점 다양해지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


기업은 더 나은 기계를 오래 쓸수 있게 만들 기술력이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최대한 소모성이 되도록 발전을 유보한다.


만들면 소모하고 소모하면 재구매하고 기업은 또 만드는것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것이다.


그것이 돈이라는 재화를 만들어내고 이것은 부를 만들고 부는 기득권을 만들고 오래 유지하려한다.


언제  기업은 망하고 또다른 생산품으로 전향되는가.


신기술이 세상에 먹히고 실용화되는 이면에는 분명 조절자가 존재하는 것 같다.

잡스가 핸드폰에 웹환경을 접목한것을 그만 생각했을까만은 기술적으로 실현 시킨 것은 그였다.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지만 기술적으로  실현시키는데는 누군가의 발명과 노력이 있어야하는것이다.

 만약 외계인이 돕는다라고 할지라도 단박에 인간의 기술문명이 진보 될 수 없는것이다. 인간이 사는 지구촌 안에서도  각기 놓인 환경의 발전이 다르므로 상용화되기까지에는 그것을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오지에 스마트폰을 생산한다하여 원주민이 스마트폰을 쓸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그 기계를 사용할 환경이 준비 되어야하는것이 우선인데

동영상 카메라가 아무리 선명한 화질을 구현한다고 해도 그것을 보여줄 모니터가 그와 상응하여 구현해낼 기술력이 없다면 동영상카메라의 선명한 화질구현은 너무 앞서기에 시장성이랑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동반성장 이라는 말이 그런것이 아닐까싶다. 국가가 주도해야 나라도 발전하지 국민 한사람만 잘한다고 될일도 아닌것이다. 예수 공자 석가가 나온들 그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시대 현존했던 그 몇몇은 깨달음을 얻었겠지만 그당시에는 대중화되지 못한것과 같다.

 

기술문명만 환경이 조성되고 동반 발전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문명도 동반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깨달음은 결국 먼저 달려가는 선지자겠지만 선지자는 또한 지표로 반드시 있어야할 0.1프로의 존재자들이다.


시간 ㅡ그러므로 때의 법칙이 존재한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동반발전의 환경을 말한다.


때를 안다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함을 생각해보며 지구의 계절은 바로 때에 대한 인간이 느끼는 유일한 자각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때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은 사계절을 깨달을 때 환경을 인식하며 지혜를 발휘한다.


사계절이 곧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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