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mes Lee Sep 25. 2020

나는 돌 사진이 없다



나는 2 남중 둘째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많이 아프고 허약했다. 바로 2살 터울에 형은 그와는 반대로 참 건강하다. 형은 어려서부터 운동과 여행 그리고 힘든 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는 정반대의 직업인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다. 형이 사관 생도를 졸업하고 장교로 처음 임관하던 날 물어봤다.


"아니 그 힘든 직업을 대체 왜 선택하는 거야? 나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다시 군대 못 갈 거 같은데"

"재밌잖아. 뛰어다니고 남자들끼리 훈련받고. 그리고 멋있잖아"


음악을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아픈 몸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

 부모님 말씀의 의하면 내 몸의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수개월이 지난 후 발견하게 되셨다고 한다. 보행기를 탈 수 있을 무렵 아이를 보행기에 태우고 놀게 놔뒀더니 계속 한쪽 방향으로만  발길질을 하고 그로 인해 자주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그러려니 하셨다는데,  자세히 보니 한쪽 발만 땅에 닿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낌새를 눈치채시고 바지와 기저귀를 벗겨 두 발을 쭉 펴보니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짧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선천성 고관절 탈구" 정확히 말하면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이라는 병명이었다.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은 태아 시기부터 나타나는 고관절의 불안정성, 아탈구, 탈구, 또는 비구 이형성증을 포함한 발달성 병변을 말하는 것으로, 선천성 고관절 탈구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탈구의 발생 시점 및 고관절 탈구 정도 등 여러 상황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여 불안정한 고관절, 아탈구 된 고관절, 탈구된 고관절 등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용어인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으로 불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 [developmental dysplasia of the hip] (서울대학교 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 병원)


"고관절 이형성증을 보이는 신생아가 치료 없이 자연히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경우는 드물며, 진단 시 고관절의 상태에 따라 그 임상적 결과가 매우 다양하다. 치료받지 않는 경우, 완전 탈구인 경우 다리가 짧아지고 근력이 약해지며 다리를 절게 되고, 정상 비구보다 위 쪽에 가성 비구가 형성되면 이 곳에 조기 퇴행성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차적으로 측만증, 요통이 발생할 수 있다. 비구의 이형성이나 아탈구가 있는 경우에는 약간의 하지 단축을 보이고 다리를 약간 저는 정도의 증상만이 있거나 증상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달성 고관절 이형성증 [developmental dysplasia of the hip] (서울대학교 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 병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발견한 탓이였던지 자칫하면 아이가 평생 절름발이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7년 전이니 의학 기술도 지금보다는 뒤쳐져 있었을 것이었고, 갓난아이에게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 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이후 나는 천장에 끈을 매달고 그 끈으로 벌린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는 시술을 하고 지내야만 했다. 1년을 넘게 그렇게 지냈으니 아이도 괴로웠고 보는 부모님도 괴로우셨다고 한다. 여름이면 엉덩이가 짓무르고 움직이는 못하는 답답함이 아기를 더욱더 괴롭혔다. 무엇보다 100프로 낫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하셨을까 싶다.


 

무신론자였던 어머니의 기도

 무신론자였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이가 낫길 바라는 마음으로 처음 교회를 가셨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직업 군인 장교 이셨다. 아버지 상관되시는 분의 사모님께서 매일 집에 찾아와 나를 안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의 감동이 일어 그날부터 교회를 나가셔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할머니는 당시 무당이셨다고 한다. 그래서 늘 제사도 지내고 했는데,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셨다. 내가 나을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셨다고 했다. 한 번도 교회를 나가보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새벽이고 밤이고 교회를 가셨다.


새벽에는 셔터문을 열고 닫을 정도로 정성을 들이셨고 열심히 기도하셨다.


주님의 기적인지 어머니의 정성이었는지 나는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겨우 붕대를 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0프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후유증은 당연히 있었고 밤이면 자주 아파서 울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도 주기적으로 고관절 부분이 아프다. 특히, 장시간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또는 걷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그날 밤은 삭씬이 쑤시고는 한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군대였다. 매일 훈련에 고된 작업 그리고 경계 근무를 서고 숙소 롤 돌아오면 정말 진통제 한알씩 꼭 먹고 잤다. 직업의 특성상 몇 시간 동안 무대에 서서 연주를 마친 날이면 집에가서 반드시 정성을 들여 스트레칭으로 뭉치고 경직된 근육들을 풀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고 어김없이 다음날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부모님의 노력으로 나는 이렇게나마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언젠가 어머니께 나의 어릴 때 사진이 너무 없는 것 같다고 물어보니, 아픈 모습을 찍을 수 없어서 사진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돌 사진이 없다.


아버지는 형과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내가 봐도 형과 아버지는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 같은 사관학교에 같은 장교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만 봐도 말 다한 것이다(현재 아버지는 군인은 아니시다). 그와 반대로 어머니는 나에게 애착을 많이 가지셨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던 일이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나를 애지중지 하셨고 품에 끼고 사셨다. 내 성향도 집에 있길 좋아했고, 어머니가 혼수로 해오셨던 피아노 앞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그로 인해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형은 밖에서 나는 집에서 주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특히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전업 주부이셨던 어머니가 집안일을 할 때 나에게 늘 피아노를 쳐달라는 어머니의 요청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설거지를 하실 때나 청소를 하실 때 아님 커피를 마실 때도 나는 늘 피아노를 쳐드리는 아들이었다.


지금도 형과 아버지는 통하는 게 많은 것 같다. 둘이 만나면 군대 이야기 또는 그 외 사적인 주제들도 잘 통하는 것 같다. 그 반면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늘 어머니와 붙어 다녔다. 쇼핑을 갈 때도 장을 볼 때도 심지어 어머니가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할 때도 그 곁에는 늘 아버지 대신 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조금은 외로워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역할을 내가 다 했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두 아들 모두 장가를 가고 딸 아들을 낳았다. 가끔은 그때가 참 그립다. 그 시절 그때가 그립다기보다는, 나를 애지중지 하며 내가 해달라는 것은 모든 다 해주셨던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 처음 아픈 아이의 다리를 발견하셨을 때는 얼마나 놀라셨겠고 가슴이 아프셨을까 싶다. 성장한 후에도 그때의 후유증으로 인해 밤마다 끙끙거리던 나를 보면 어머니는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시고는 했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참 그립다. 그러한 아픔으로 인해 둘째 아들 더 많이 안아주시고 품에 끼고 애지중지 하셨던 어머니의 품이 오늘따라 더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Did you hug your cactus tod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