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by hotlionheart

<언니가 온다 1>


새벽부터 이불과 침대 매트리스 시트, 베개 커버를 벗겨 세탁기에 넣고, 평소에는 쓰지 않는 섬유유연제까지 넣어 이불빨래를 하고 있다. 이번 주에 후각과 미각이 예민한 언니가 뉴욕에서 오기 때문이다.

언니는 뉴욕에서 산지 30년이 넘었다. 그 세월을 몇 마디 단어로 요약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언니였기에 지금의 성공을 이루었다고는 할 수 있겠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었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을 채우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빠가 개원하시기 전에 일하던 병원 의사들과 유원지에 놀러 가실 때 언니를 데리고 갔었다고 한다. 그때 언니는 대여섯 살 정도였는데, 가르친 적도 없는 한글을 혼자서 다 익혔었고, 유원지에서는 역시 혼자 배운 에델바이스 영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이야 워낙 조기 영어교육이 이루어지니 이런 게 흔한 일이겠지만, 반세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일곱 살까지도 한글을 잘 못 읽어서, 엄마가 아빠한테 “쟤는 미련한가 보다”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 말에 아빠는 “늦게 트이려고 그런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늦게 트인다는 시기가 나는 요 근래 몇 년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언니는 타고난 머리에 강한 성격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추진력이 있는 행동파였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가 버렸고, 좋은 대학은 못 가게 되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동안에 여권만 나오면 되는 시기였을 때, 미국 교포와 소개팅을 하더니 한 달 사귀고 결혼을 하겠다고 집에 선포를 했다. 집안은 발칵 뒤집어지고, 언니의 남자친구가 사기꾼 아니냐는 부모님들 말에 준재벌집 아들인 언니 남친은 한국에 있는 부동산 등기부부터 호적 등본까지 다 떼서 언니 편에 보내왔었다. 그 서류들을 보고 부모님은 안심이 되었는지 결혼을 허락하고, 언니 남친의 미국 부모님들이 나와서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함 들어오는 날 언니가 받은 함에는 각종 보석들 세트와 명품 옷과 신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버버리 트렌치 코트에 구찌 신발은 아직 대중들에게 친숙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함을 열어보고 다들 놀라시고, 부모님은 흡족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언니가 온다 2>


그렇게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결혼을 하고 미국 뉴저지에 살게 된 언니는 결혼 생활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70년대에 일가친척까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언니의 전남편 가족들은 끈끈한 가족애가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시아버지가 부자이니 그 집 세 아들들은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도 아버지가 마음대로 시키는 음식을 먹었어야 할 정도로 아버지의 권력이 너무도 컸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견디다 못한 언니는 결혼 3년 만에 혈혈단신으로 시집에서 탈출해서 독립을 먼저 하고 이혼을 진행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우리 부모님조차 이혼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였기에, 언니는 거의 십 년 동안 한국에 들어오질 않았었다. 나중에 내가 뉴욕에 사는 언니한테 갔을 때, 언니는 의류를 생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에 들어가 마케팅 일을 하고 있었다. 의류 공장이 있는 남미로 출장을 자주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언니는 회사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FIT에서 패션 멀천다이징(Fashion merchandising)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혼하고 나왔을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에 얻은 일은 옷에 아플리케를 만들어 다는 일이었다고 했다. 거기서 흑인들과도 같이 일하면서 싸움도 해 가면서, 점차 한 단계씩 직장을 업그레이드시켜 갔다고 했었다.

언니는 좋은 직장을 다니며 살만해지기 전 힘들었던 시기에 스웨덴 남친을 사귀게 되었었다. 그분은 언니와 나이차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언니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줬던 분이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분은 행동과 말이 우아하고 인품이 좋은 분이셨다. 그분과 칠 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언니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잦은 기침을 하던 그분은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다. 수술하려고 폐를 열어봤더니 이미 암이 다 퍼져있어서 다시 닫고 수술장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직장을 쉬고 있던 나는 뉴욕으로 가서 언니와 함께 병원에 매일 갔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언니와 그분은 병실에서 목사님과 친구들 앞에서 혼인서약을 하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하루는 언니가 평소와 달리 병원에서 같이 자자고 해서 그날은 병실의 긴 소파에서 언니와 어정쩡하게 누워서 자고 있었다. 동틀 무렵 언니와 나는 동시에 잠이 깼다. 그때 언니는 본능적으로 침대로 다가가 누워있는 그분을 쓰다듬으며, “지금 가고 있다”라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영혼이 몸통에서부터 얼굴을 지나 머리끝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바이탈 싸인이 제로가 되면서,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와 사망 선고를 했다. 그렇게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언니가 온다 3>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 뒤에 언니는 맨해튼에서 브룩클린으로 이사를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프렌치 레스토랑을 열려고 반년 동안 가게 자리를 보러 다녔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었는데, 그때 맨하탄의 부동산은 원래도 비쌌지만 부동산 상승기에 있었던 것 같다. 맨하탄의 집을 팔고, 맨하탄에서 지하철역으로 네 정거장 떨어진 브룩클린으로 이사를 오면서 모기지(mortgage loan)를 받아 4층 짜리 작은 주거용 건물을 사고 남은 돈으로 프렌치 레스토랑을 열었다.

가게 자리만 6개월을 보러 다녀서 그랬는지 프렌치 레스토랑은 손님이 북적북적했었다. 욕심이 많은 언니는 몇 년 뒤에 한국 레스토랑과 미국식 레스토랑까지 열어 동시에 레스토랑을 세 개나 운영하게 되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멕시칸들이 많기도 했고, 콜롬비아에서 이민 온 막역한 변호사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언니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친구들과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 유럽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여행은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이었다. 현지인 쉐프와 가이드로 구성된 여행팀이 언니와 친구들을 짚차와 비행기를 태우고 다니면서, 투어 스팟에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해주면서 관광을 시켜주는 시스템이라고 했었다.

프랑스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언니는 또 불어 공부에 불이 붙어서 파리에 어학연수를 몇 주 동안 가 있기도 했었다. 언니는 자기가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를 했었으면 좋은 대학에 갔었을 거라고 우스갯 소리를 했었다.

미국 경기 불황시기에 언니는 두 개의 레스토랑을 정리하고, 프렌치 레스토랑 한 개만 남겨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 나갔다. 다행히 가게 주인이 좋은 사람이어서 그 시기에 월세를 반씩만 내라고 했었기에 겨우 운영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정말 경제 강국이라고 느낀 것은 팬데믹 말미에 두 세 차례에 걸쳐 자영업자들에게 코로나 지원금을 지급해 줬는데, 그 금액이 언니의 경우 일억이 훨씬 넘는 액수였다고 한다. 그걸로 팬데믹 기간의 손실을 메꾸고도 많은 금액이 남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진 엔데믹의 보복 소비로 다시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복작복작해졌다고 한다.

작년 초부터인가는 파리 유학파 디저트 선생님한테서 베이킹과 디저트를 배우더니, 타고난 감각으로 예쁘고 맛있는 쿠키, 케이크, 각종 디저트를 만들어서 자기 레스토랑에서 팔고 있고, 꽤 인기도 있는 듯해 보였다. 이 내용은 언니 인스타를 보고서야 알게 된 내용이다.



<언니가 온다 4>


언니의 인스타를 보고서야 언니가 베이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는 재작년 가을에 언니가 나왔을 때의 일 때문이었다. 내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언니가-이제까지도 그래왔지만- 선 넘는 발언들을 연이어했었다. 그리고는 언니가 뉴욕으로 돌아간 후 나는 연락도 안 하고 몇 달을 보냈다. 언니한테서 온 "연락이 없는 거 보니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카톡을 보고서 나는 참고 있었던 화가 폭발해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에게 맞서서 내가 왜 기분이 상하게 되었는지를 세세히 적어 카톡을 보냈었는데, 이에 언니는 "그럼 그때 말을 했어야지. 몇 달 동안 그걸 부글부글 하고 있었냐. “라고 답해왔다. 이런 식으로 말싸움이 오간 날 이후 언니는 내 카톡을 ‘읽씹’ 하는 단계를 지나 ‘읽지도 않는 ‘ 단계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나도 ’ 그래라. 나도 연락 안 할 거다.‘ 이랬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언니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게 되었다. 마치 헤어진 연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듯이, 나는 틈틈이 ”잘 지내냐 “, ”보고 싶다 “ 등등의 카톡을 보내왔다. 전혀 답이 없던 언니가 이번주에 나온다고 피부과와 치과를 예약해 달라고 톡이 왔다. 나는 신속하게 병원들을 예약하고 답톡을 해줬다. 그리고 아빠가 바쁘셔서 내가 새벽에 인천공항으로 나가게 될 거라고 했다. 입국하는 날 공항에서 우리 집으로 와서 짐을 풀고, 오후에 강남 피부과 (모시고) 갔다가 딸아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갈 거냐고 물었더니, ”구래“ 하고 답이 왔다. 아휴 언니라서 쥐어박을 수도 없고..

‘새벽에 공항 입국장에서 표정관리 잘해야지..‘

기 쎈 언니가 ’무섭다.‘



<언니가 왔다 1>


그제 새벽 여섯 시 반에 언니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일 년 넘게 소원하게 지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앉아서 기다리는데 졸음 때문인지 뭔지 자꾸 눈물이 찔끔찔끔 눈가로 새어 나왔다. 저 안쪽에서 츄리닝 바지에 복고풍 안경을 쓰고, 탈색으로 밝은 금빛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빛나는 언니가 걸어 나왔다. 평생 운동을 해서 다부진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그냥 작은 동양 여자로 보였다. 일어나서 언니한테 다가가는데 눈물이 자꾸 볼을 타고 내렸다. 언니가 놀란 눈으로 “왜?” 하는데, 그냥 ”반가워서 “라고 답했다. 언니한테 하소연하고 싶지만 말 못 할 일들이 잠시 떠올랐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어떻게 지내고 살았는지 한참 얘기를 했다. 작년에 뉴욕은 비가 칠십 며칠이나 와서 레스토랑에 손님이 줄었다고 한다.

집에 와서는 짐을 풀고 체력 좋은 언니는 목욕탕에 가서 세신사한테 때도 밀고 마사지까지 받고 왔다. 좀 쉬면서 내가 끓여준 시금치 두부 된장국에 숙주나물, 콩나물, 갓김치, 굴비구이를 막 한 흰밥에 맛있게 먹었다.

언니가 나오면 나는 수행비서 노릇을 하기에 언니를 차에 태우고 오후 스케줄인 강남 피부과로 이동했다. 언니는 담당 실장님이 입이 찢어지게 결제를 하고 VIP 라운지로 이동해서 서너 시간 동안 시술을 받았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간다고, 나도 실장님이 권하는 시술을 몇 가지 받았다. 내 시술이 끝나고도 '언니는 인조인간이 돼서 나오는 것인가?'라고 할 정도로 기다린 다음에야 언니가 나왔다. 얼굴, 목, 기타 부위를 살펴보니 '확실히 돈이 좋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 딸아이는 대중교통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거의 두 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금요일인 어제는 딸아이와 언니가 딸의 남친이 일하는 양고기집을 예약해서 가기로 했다. 나는 그 시간에 서울에서 로스팅 고급 실기시험이 있어서 같이 가지는 못했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오니 언니는 시차 때문인지 잠들기 직전이었다.

오늘 새벽 세시에 나도 언니도 잠이 깨서 딸아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

딸아이는 재작년에 세 군데에 타투를 했다. 다 푸른 염료로 했었는데, 손가락 사이에 무슨 음표 같은 것과 등뒤 어깨죽지에 돛단배 모양과 발목 안쪽에 형체 모를 타투를 했었다.

언니가 딸아이 손가락 사이에 있는 타투가 <세미 콜론>이라고 하면서, 그 뜻이 "자살 방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언니가 딸아이에게 "너 그 뜻을 알고서 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하.. 나는 눈 뜬 장님처럼 그런 것도 모르고 타투 좀 그만하라고 타박을 했었는데..

언니는 아이에게는 아는 척을 하지 말고 알고만 있으라고 하면서 얘기를 해줬다.

친구들과 거제도 여행을 가는 언니를 광명역에 데려다주고 와서 정신없이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아이가 공부한다고 카페에 간다고 준비 중이다. 나는 “공부를 왜 해?” 하면서 덧붙여서 “이모 하고는 말이 통하고 엄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이거지?”라고 심통 아닌 심통을 부려본다. 그러자 아이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엉, 엉” 이렇게 답을 한다.

네 마음은 아직도 그렇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는데, 나는 그걸 다 헤아려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내 딸아.



<언니가 왔다 2>


남편의 출장

사소한 일이 불씨가 되어 서로에게 폭발했었기에 며칠 동안 남편과의 분위기가 냉랭해졌었다. ‘저 인간 얼굴 안 보고 사는 날이 내 인생 해방의 날이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언니도 집에 와 있는데, 언니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니 더 꼴도 보기가 싫어졌었다.

남편은 급하게 잡힌 베트남 출장을 간다고 오늘 새벽 세시 반에 깨워달라고 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 삼십 분 전에 나는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마시고 나서 버릴 수 있는 종이컵에 얼음을 한가득 담아 아이스 라떼를 만들어 뚜껑을 닫고, 혹시나 커피가 셀까 봐 플라스틱 투명 컵 안에 종이컵을 넣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난 남편은 스트레쓰로 잇몸이 부었다며 세수만 하고, 츄리닝 복장으로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 문제가 터져서 그걸 해결하느라고 부쩍 얼굴이 야위었다. 현관을 나서는 남편의 몸 상태가 걱정이 되면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눈도 안 마주치려고 했었는데, 남편도 자기 몸이 안 좋아서 마음이 약해졌는지 작별 인사를 하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잘 갔다 와라 내 평생의 웬수야’


언니의 쇼핑

내 방에서 자고 있는 언니는 이제 시차에 적응이 되었나 보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스탠드 하나를 켜고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이러고 있는데 미동도 없이 자고 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미제“를 좋아했던 나는 신발이나 옷을 직구하면서 배송지를 언니네 집으로 적곤 했었다. 그것들을 받아서 입고 신었을 때, 미쿡 물건만의 색상과 디자인이 여기 한국 거리에서는 차별화되어 보였기 때문에 직구를 좋아했었다. 중간중간에 언니가 내 택배를 보내주기도 했었고, 거의 매년 한국에 나오는 언니의 트렁크에서 내 쇼핑 품목들을 풀어보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딱히 주문하고 싶은 아이템이 없었다. 작년 하반기에 옷을 싹 정리하고 버려지는 옷 꾸러미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기도 했었고, 미쿡 상표를 단 물건들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게도 언니는 이삼 년 전부터 한국에 나올 때마다 중국 보따리 장사꾼처럼 한국 물건들을 싹쓸이 해 가고 있다. 필요한 물품 목록들을 미리 작성해 와서는 올리브영의 핫 아이템들을 나에게 불러주어 수십만 원을 결제하게 하고, 쿠팡에서도, 기타 다른 먹거리를 파는 싸이트에서도 수십만 원씩을 결제하게 한다. 물론 가기 전에 다 현금으로 정산을 해주고 간다. 보통 그 금액이 백만 원이 넘어간다.

지난주에 언니는 딸아이와 함께 제법 규모가 큰 동네 다이소에서 십만 원어치 물건을 플렉스 하고, 그 옆에 유니클로에 들려 무슨 콜라보 컬렉션을 이것저것 사 왔다. 나도 전에 다이소에서 수업 관련 물품들을 십만 원 정도 사봤었는데, 장바구니 3개가 필요했었다.

어제 언니는 전에 다니던 피부과에 남아있는 금액을 쓰기 위해서 갔다가 몇 배를 더 결제하고 몸을 리프팅해 주는 시술을 받고, 그 시술 예약을 몇 차례 더 하고 왔다. 우리 집 전담 미용실에도 들려 염색과 클리닉을 하고, 또 다른 단골 가게에서 패디큐어와 발 관리, 네일을 했다.

이런 종류의 미용 관련 시술이 한국이 훨씬 싸기도 하고, 한국 사람들 손이 야무져서 결과물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밖에서 뭐 하나 하고 집에 올 때마다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한국 거 너무 좋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삼 년 전쯤엔가 언니가 파리에 갔을 때, 주변에 앉아있는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이제 한국말로 남 욕 못하겠다고 했었다. 요즘은 그런 현상이 더 심해져서 얼마 전에 콜롬비아 시골 마을에 갔었는데,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현지인들이 반가워하면서 한국말을 건네왔다고 한다.

K pop과 K drama 덕분에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니 어디 나가면 어깨가 자연스럽게 펴진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한 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어릴 때부터 옆 사람과 겨뤄야 하는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좀 더 유연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타인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가 왔다 3>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월, 수는 새로운 학교에서 80분씩 두 타임 수업을 하고, 화, 목은 기존 학교에서 40분씩 두 타임 수업을 한다. 화, 목 학교는 방송댄스, 요리, 컴퓨터 과목이 인기가 많아서인지 내 과목은 학생수가 작년과 비교해서 반토막이 났다. 새로운 학교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기는 하지만, 보통 40분 하는 수업을 80분이나 해야 되니 아이들도 나도 힘이 든다. 중간에 5분 쉬게 한 뒤 영상을 따로 준비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게임도 하게 해서 겨우 지루함을 달래주고 있다.

이번 주 목요일 밤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야식으로 순대를 시켰었다. 배달된 순대를 보고는 언니가 기겁을 하면서, 이 시간에 순대를 먹는 게 말이 되냐며 쏘아붙였다. 나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몇 개만 먹을게. 너무 먹고 싶어.”라고 대답했지만 언니는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 버렸다.

금요일은 언니와 수원 스타필드에 갔다가 부모님 댁에 가기로 한 날이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아침에 언니의 커피를 만들어서 ‘진상’ 하면서 어제의 야식 얘기가 안 나오길 바랬다. 아니나 다를까 언니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삼십 분간 내 몸 상태와 규칙적인 식사 시간, 운동에 대해 설교를 늘어놨다. 이 설교가 빨리 끝이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손하고 겸허하게 “알았어”, “나도 알아” 등의 추임새를 반복했다.

보통 쇼핑몰은 복잡하고 갔다 오면 사람들한테 기가 빨려서인지 나는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한 동안 누워 있어야 한다. 그래도 언니가 왔으니까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수원 스타필드에 구경삼아 언니와 함께 갔다.

별마당 도서관이 생각보다 크고 넓어서 깜짝 놀랐다. 공간을 즐기며 휴식을 하면서, 쇼핑몰에 오래 머물면서 쇼핑도 많이 하라는 의도 치고는 너무 컸다. ‘키즈 카페’ 아니고 ‘어덜트 카페’처럼 보였다. 그래서 정 모 씨는 마이너스의 손인가 싶기도 했다.

전 층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ZARA, H&M, COS, Massimo Dutti 가 한 층에 쫙 있다는 거였다.

그다음으로는 귀염뽀짝 캐릭터 샾이 여러 개 있는 게 좋았다. 언니는 캐릭터 샾에서 직원들과 친구들에게 줄 예쁜 패브릭과 키링, 핸드폰 홀더를 잔뜩 샀다. 나도 마음에 드는 아이폰 케이스를 하나 발견해서 장착을 했다.

<무지>에 들어가서는 잠옷을 좋아하는 우리 자매는 이 색이 어울리나 저 패턴이 어울리나 서로 이것저것 얼굴에 대보면서 신이 났다. 언니는 파란색과 하늘색의 패턴이 있는 잠옷 두벌을 고르고, 나는 아이보리색의 무지 잠옷을 골랐다. 또 우리 집 쓰레기통이 낡았다며 발로 페달을 밟아 뚜껑을 여는 쓰레기통을 골라줬다. 봄에 신을 면으로 만들어진 페이크 싹스도 몇 개 골랐다. 계산대에 가서는 언니가 다 계산을 하겠다고 나섰다.

‘언니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잘 들었습니다.’라는 훈훈한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싹트는 자매애’다.

중간에 아빠한테서 카톡이 왔다. 오늘은 8시에 업무가 끝나니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두 시간 넘게 돌아다니느라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 퇴근 시간에 걸릴 것 같아서 언니에게 그만 가자고 했다. 네시 반에 출발했는데 벌써 도로에는 차량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부모님 집 앞에 도착해서 언니를 내려주고 나는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언니가 놀라면서 ‘강남 신세계 스위트 파크에서 산 케이크’로 나를 유혹을 해 본다.

“너 이거 안 먹을 거야?”

“응”

“피곤하다면서 집에 들어가서 좀 쉬다가 가”,

“엄마를 보는 게 더 피곤해”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왔다 4>


언니가 오면 그동안에 소원했던 이모님들과 사촌들과의 연락이 빈번해진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언니는 성인 ADHD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안에서도 부산스럽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메일 업무를 보면서 영어와 한국어 유튜브 채널을 돌려가며 듣고, 갑자기 종목을 바꿔 스페인어를 노트에 쓰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아침 10시에 예약해 놓은 운동을 하러 나가면 그제서야 나는 내 정신을 챙길 수 있다. 부지런하게도 도착한 날부터 내가 다니는 운동 센터에서 필라테스 10회권을 끊어서 횟수를 꽉꽉 채워 수업을 듣고 있다. 또 그 사이사이에 서울, 부산, 거제도, 광주를 찍고 다시 수원과 서울을 오가고 있다.

부산과 거제도는 35년 지기 대학 친구들과 매년 가는 여행의 목적지였고, 광주는 이모님과 사촌 남동생을 만나기 위해서 갔었다. 어제는 막내 이모님과 이모부님을 뵈러 서울의 한 스시집으로 언니를 모시고 갔다가 다시 부모님 댁으로 데려다 줬다. 나는 도합 운전 세 시간을 하고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로 슬라이딩을 했다. 더 이상 차는 못 타겠어서 남편 혼자서 딸아이를 숙소로 데려다주게 되었다.

막내 이모님은 대전에서 한평생을 사셨지만, 귀한 막내아들의 외동딸 육아를 위해 성남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황혼육아가 올해로 칠 년째이신데, 대전과 분당을 오가시며 육아를 해오시다가 힘이 드셔서 아예 아들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사촌 올케인 아이의 엄마는 대학 졸업 후 일을 하다가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해서 일학 년일 때 사촌 남동생과 결혼을 했다. 사촌 남동생은 훤칠한 키에 훈남 외모에 전문직 종사자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여자 조건을 너무 본 것 같다. 아이 엄마는 후덜덜한 사학재단 집안 딸인 데다가 사촌 남동생 보다 아홉 살이 어리다. 의대 다니면서 아이를 하나 낳고서는 서울 본인의 본가에서 주중에 학교를 다녔고, 주말에만 아이가 있는 집으로 오면서 칠 년을 보냈다. 현재는 국가고시 재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새 이모님은 칠십 대 후반이 되었고, 이모부님은 팔순이 넘게 되었다. 집안일하는 사람을 아들 집으로 일주일에 두 번 부른다고는 하는데, 하루에 네 시간밖에 안 쓰신다고 하신다.

사촌 남동생은 부인에게 불만이 없냐고 이모님께 물었더니 이모가 말을 아끼시며 “너가 콕 찝어서 얘기를 하는구나..”라고 하시는데, 이모 표정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촌 남동생도 일주일에 두 번은 부원장에게 병원을 맡겨놓고 아이스하키며 스케이트를 타러 다닌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가슴속에서 부화가 치밀었다. 부성애,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이와 부대끼면서 생기는 것인데, 자기 자식은 노쇠한 부모님께 맡겨놓고 뭐 하는 짓들인가 싶었다. 내가 한 치 건너인 관계이기도 하고, 내 가정 돌보는 것도 어려움이 있으니 남의 가정사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도 없기에 아무 말도 더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나무숲에 외치듯이 여기에 쓰고 있다. 가정을 꾸렸으면 있는 힘을 다해 서로의 책임을 다 하라고.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한참 엄마, 아빠 사랑을 듬뿍 받을 나이에 그렇게 커야 되는 것인가 싶다.



<언니가 가고 있다>


언니는 어제저녁 델타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일정이었다. 저녁 비행기가 한 번 더 딜레이 되면서, 미네아폴리스에서 트랜짓 해야하는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 상황을 공항 직원에게 얘기했더니 비행기 티켓을 오늘 날짜로 바꿔주면서 비지니스석 한 자리 남은 걸로 좌석을 예약해 주고, 공항에서 셔틀로 오분 거리에 있는 호텔까지 잡아줬다고 한다. 델타 항공은 대한항공과 코드 쉐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신속한 응대는 대한항공 직원이 해줬다고 한다. 언니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보이스톡으로 "역시 한국 사람 종특"이라고 하면서 상당히 만족해했다. 이 통화를 끝으로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지금쯤은 태평양을 다 건넜으려나.. 언니가 옆에 있으니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외로움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서로 이해시키려고 애쓰거나 큰 노력 없이도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의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오늘 늦게 출근하는 남편이 웬일로 내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나도 오랜만에 옆에 누워 별이와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남편이 "그래, 처형하고는 화해했어?"라고 물어왔다. 나는 첫날 공항에서 언니를 기다리면서 새벽이라 졸렸는지 자꾸 눈물이 나왔고, 게이트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언니를 보니 언니는 그냥 작은 동양 여자였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자 언니는 “왜?” 그랬고, 나는 “반가워서”라고 얼버무렸다는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또 울먹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갑자기 “처형하고 목소리가 똑같다”라는 말만 던졌다.

남편은 학창 시절부터 우리 언니를 무서워했었다. 롱 롱 히스토리가 있지만 조용히 생략하고 넘어가 본다.

나이가 들수록 자매지간이나 엄마와 딸의 목소리가 점점 비슷해지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특히 전화 목소리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더 쉽지 않다.

우리는 한 집에서 한 부모 아래서 자라다가 각자 세상으로 나가 수십 년을 헤매고 살아왔다. 나이 들어 목소리가 비슷해지는 현상은 아마도 가족의 뿌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게 되는 본능의 발현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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