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넘치는 말, 글이라는 댐

by 박성열

매일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잊지 않기 위해 메모장에 기록한다. 그것들은 생명력이 강하지 않아서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지워지고나면 메모장 속에서기록으로만 존재한다.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의 마모를 이겨내고 꾸준히 붙잡혀있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짧게 스치는 것들은 메모장에 기록되는 순간 활기를 잃고 몸에서 빠져나간다. 이 때 지면은 생각을 활자로 변환하는 공간으로만 기능한다. 이것은 기억의 외주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짧은 기록은 지키기 위해 글로써 가둔다기보다 맡기기 위해 글로써 빼내는 것에 가깝다. 잊고 싶지 않을만큼 소중해서 기록한다기보다, 당장 머릿속에 내어줄 공간이 없기에 저장하듯 적는 것이다. 지금은 여력이 없지만 언젠가 한 번쯤 다뤄볼만한 것이라는 마음에서.


한편으로 내게 기록은 일종의 의료행위와 같다. 내 몸에는 천방지축 발산하는 촉수가 기생한다. 그것은 아주 예민해서 주변의 모든 자극을 양분 삼아 자란다. 예민한만큼 무르기도해서 조금만 방치해도 쉽게 곪는다. 농이 차오르면 크게 부풀어 몸의 온갖 구멍을 막아 숙주를 괴롭힌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으며 귀를 닫는다.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 농을 빼듯 기록한다. 염증을 덜어내듯 그렇게 쓰는 것이다. 소화된 것은 내보내지는(내보내져야하는) 유기체의 항상성 아래, 어쩌면 살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쓴다.


일을 시작하고부터 완결된 글보다는 짧은 기록이 주를 이뤘다. 그마저도 흔치 않았다. 연명을 위한 무의미한 기록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식(食)의 낙을 모르는 사람이 살기 위해 음식물을 쑤셔 넣을 때 느낄법한 자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와중에도 의식처럼 행해지는 어떤 기록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는 거부감까지 들었다. 진정 써야하는 것은 쓰지 않고서는 배기지 않을만큼 나를 괴롭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어쩌면 운명처럼 찾아올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여전히 예상치 못한 것이 가져다주는 전율 따위를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명분이라라는 핑계에 기대어 게으름을 포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속하는 태도가 나를 발목잡고 있음을 안다. 나의 고민은 대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느라 놓쳐버린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고민 끝에 적어낸 글은 회한과 다짐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만다. 그 속에 현재는 없다. 과거와 미래만 존재할 뿐이다. 더 이상 뒤와 앞을 논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지금의 나를 반추하도록 돕는 정류장일 뿐 목적지가 될 수 없다.


'글이란, 영화란, 예술이란... 응당 OO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단정한 표현이지만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나는 늘 내가 만들어낸 문턱 앞에서 넘어진다. 그렇게 배우고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살아낸만큼만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서, 살아갈 나는 항상 살아온 나 때문에 좌절한다.

그러므로 주문처럼 왼다. 다시 시험에 들 것을 알기에 부적처럼 품에 새긴다. 원칙은 존중하되 법칙까지 고정할 필요는 없다. 장르를 이해하되 따를 필요는 없다. 나의 것은 위대하지 않으면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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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말답고 글은 글다워야하지만, 그동안 말은 글답게 글은 말답게 사용해왔다. 신중한 성격 탓이다. 말은 쉽게 꺼낼 수 있어서 아끼지 않는 것이 미덕이지만, 그만큼 거침이 없어서 가시 돋지 않게 고르느라 글처럼 눌러왔다. 그러다 못 다한 말이 생기면 글을 찾았다. 꺼내지 못한 것을 글에 꾹꾹 눌러담아 늘이다보니 설교처럼 장황해졌다.


터져나오는 말을 글이라는 댐에 가두면서 그렇게 살아왔나보다. 흘러넘치는 생각을 기록으로 뱉어내 농도를 맞추면서 그렇게 살아가나보다.


당장 블로그에만 임시저장된 글만 18개가 넘는다. 이 자리를 빌려 너희들을 해방시킨다. 잠들어있던 것들아. 여기에 노출됨으로써, 누군가에게 관측될 수 있도록. 관측되므로써 존재할 수 있도록.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기 위해 농을 빼듯 모아온 기록이 누군가에게 읽혀 그들에 새로운 생명을 전할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쁜 일이겠다. 살고자 몸부림친, 동사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삶이라는 명사로 전해지는 경이. 죽어있는 글이 살아있는 생명을 움직이는 행복.


1. 맹수와 사육사의 이야기.

구아다니노의 본즈 앤 올에서 착안. 푸바오를 모델로 염두. 어릴적부터 사육사의 손을 타고 자란 맹수가 급격한 환경 변화로 심각한 기근을 마주한다. 설상가상 동물원은 외부와 단절. 사육사와 맹수는 서로를 껴안고 천천히 죽어가다가 본능을 이기지 못한 맹수가 사육사를 잡아먹어야겠다는(잡아먹고 싶어하는) 행동을 보인다. 사육사는 섬칫 놀라다가 천천히 몸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맹수는 사육사를 먹어치우고 난 다음 잠시 슬퍼하는 듯 보이지만 이내 배가 고파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실족사한다.


2. 비행기에서 노비츠키.

삿포로 여행이 끝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노비츠키를 듣는다. 비행 시간은 길지 않다. 약 세 시간. 은솔이는 옆에서 신서유기를 본다. 두 배 속도로. 화면을 계속 지그시 누르고 있어야할텐데 힘이 들지 않을까. 그러다 곧 까무룩 잠에 들겠지. 출국할 때는 속이 좋지 않아서 계속 잠을 청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아프다. 윗배를 누가 강하게 누르는 것 같다. 닷새 간 너무 많이 먹었나. 그녀의 불편이 내게 옮겨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 덜 아프게 느껴진다. 내가 대신 아파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다. 아니 그냥 벌을 받는 건가. 일본에서 혼날 짓을 했다. 아뿔싸 그래서 혼이 나는가 보다.


노이즈 캔슬링은 비행기를 탈 때 진가가 드러난다. 비행 소음이 최소화되어서 음악이 선명하게 들린다. 무엇보다 잠도 잘 온다. 비행기 모드 상태에선 가사를 볼 수 없어서 더 집중해서 들었다.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생긴다. / stinky kiss의 '내 목 뒤에 난 잔털도 다 의도됨.' 침대에서 막걸리의 '시간과 한강을 등지고 앉아 생각만 하는 난 짝퉁 로댕' crime의 '처음만 어려웠네, 우리가 만났을 때 내숭만 떨던 입을 하늘이 벌려줬네 동호대교 밑에서 하늘의 핑크빛 피로'. 창작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열광하게 된다. 은밀한 경험을 관음하는 길티 플레저와 (나만의 생소한 경험인 줄 알았는데), 사실 당신도 경험한 적이 있구나 - 하는 유대감이 합쳐져서 전율이 인다.


3. 나만이 나를 견딘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쁘고 싶었던 적이 단언컨대 한 번도 없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빌려온 고양이 같은, 심드렁한 습성이 화를 키운다. 모든 개인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환경보다 개인에 초점을 두고 사회를 경시한다. 더 나은 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긍정적 믿음. 훌륭한 주변의 사람풀.의지를 부정당하는 것이 싫고, 환경이 나를 정의하는 것이 싫고, 거대한 소속이 나를 대변하는 것을 경계하고, 일반화를 일삼는 인지적 구두쇠가 되고 싶지 않아한다. 그래서 피곤해진다. 허무주의에 빠진다.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된다. 최근 좋은 일을 많이 했다면 그 사람은 '요즘' 좋은 사람일 것이다. 과거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최근 뜸했다면 그 사람은 '예전에'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좋은 일을 꾸준히 해온 사람은 '지금껏' 좋은 사람일 것이다. 좋은 일을 특정 수준까지 하면 좋은 사람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의 자격은 영구히 갱신해야한다. 유효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회적 같은 것이다.


좋은 일은 아마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비겁하지 않으며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비겁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 판단할 수 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음은 사후 결과에 따라 평가될 것이므로 대체로 불가능하다. 맞아떨어졌다면 운이 좋은 것이겠지. 내가 나쁜 사람으로 여겨진 때가 있다면 단지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젊음은 젊은이에게 낭비라서

- <애프터썬(2022)>


이렇다 할 플롯도 없이 사건이 나열된 이 영화처럼. 사건은 기억의 재료이고 삶은 기억의 총체다. 인간은 늘 한 발 늦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영원히 현재를 만끽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자면, 신경전달물질 혹은 호르몬이 촉발한 주관적 현실에 매료될 뿐, 객관적 사실로 구성된 현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시간이 흐르고 나서 과거가 된 현재를 반추하며 교훈을 얻을 뿐이다. 사건을 겪는 와중엔 감정에 충실할 뿐이고, 이후 감정의 부산물로 잉태된 교훈으로 성장하게 된다. 깨달음은 늘 나중에 찾아오기에 인간은 늘 후회 속에 산다. 눈을 감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는 셈이다. 아, 어쩌면 주마등이 스치는 최후의 순간엔 비로소 술래를 만나게 될까. 왜. 인간은 왜. 늦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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