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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사람 Nov 14. 2022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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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 생일, 남편은 늦게 귀가했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이미 맥주 서너 캔을 따버렸고, 아들은 나중에 부르라며 제 방으로 가버렸다. 딸은 시험이 코앞이라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우리 집에서 아빠가 제일 독립적이야. 케이크를 담으며 딸이 말했다. 아빠 mbti 뭐야?  요약하면, 아들과 딸 남편 모두 비슷한 유형인데 나만 다른 유형에 가까웠다. 느거 엄마만 별종이네. 이미 한 잔 하고 들어온 남편이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골려먹는 표정으로 막 웃었다. 그렇다. 나만 다른 것 같다는 느낌, 팍팍 왔었다. 애들이 자라면서 점점 확신에 가까웠던 것. 나는 entp다. mbti의 농담 같은 존재라나. 머릿속의 대부분이 알쏭달쏭이거나 알록달록한 채로. 천재 같지만 정신연령 5세인. 맞는 것 같다. 나를 닮지 않아 좋아 죽겠는지 셋이서 웃고 난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좀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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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카페에 갔다.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신다. 석 잔 이상 드시는 날도 많으시다. 아메리카노, 라테,

에스프레소까지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신다. 아버지와 카페에 앉아 가을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다 가을만 갖다 붙여도 나무가 생각을 가진 것만 . 나이가 들수록 정면을 응시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가령, 태양이라든지 예전 일기장 혹은 나의 아버지. 차마 정면으로 볼 수 없어 나무가 비치는 카페 큰 유리창 비스듬히 아버지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람에게 시간이 붙고 시간이 흩어지고 시간이 굳어가는 걸 본다.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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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모이지도 않는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뭐든지 잘 알아서 하는 게 드문 편이다.

  대부분 하면서 알아간다.

  이것 역시 예외일 순 없겠지.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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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은 비가 왔다. 세상 속으로 비가 내렸다. 나는 그 밤 우산을 펼쳐 들고 골목을 걸었다. 문 닫힌 집들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선 내 발소리를 들어주었다. 어떤 순간에 가장  가난하게 존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밤 나는 왠지 가난하다는 생각에 빠져서 골목을 여러 번 돌아야 했다. 비는 기대만큼 내리질 못하고 주춤거리다 새벽쯤에서야 가느다란 발목을 잘라버렸다. 그런 것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잘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피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두 번 정도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그이들은 비 정도는 내려줘야 떠오르는 기억이 되었다. 더 이상 의미도 감정도 없는 얼굴.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때 우리는 전부인 것처럼 세상 속에 엉켜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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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을 한 달째 가방에 넣고 다니다 이제야 다 읽었다. 아니 읽어버렸다. 포켓용 책에 가까운 분량을 한 달째 끝내지도 못하다니. 나의 집중력의 결여도 있거니와 이 여인이 그러한 여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긴 얘기를 짧게 끝낸다든가, 짧게 끝날 얘기도 길게 길게 늘어놓는 성향이 이 여인에게 있다. 어쨌든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내적 갈등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몇 년 전부터 왼손 노트를 만들어놓고 왼손으로 일기를 가끔 쓰곤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오랫동안 쪼개 읽어서 그런지 여인의 행동에 통일성이 없고, 문맥도 자꾸 흩어져서 나중에는 책이 나를 읽듯 읽었다. 다 읽고, 다시는 볼일 없는 것처럼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두었는데 어제 새벽 다시 책을 펼쳐 드는 나를 보고 놀라웠다. 꼼짝 않고 아침까지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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