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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거다. 아무 이유없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글로

레프 톨스토이, 민음사, 2023

한 인간의 질병을 통한 내면의 나약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어떻게 얌전히 죽을 수 있는가?’가 가장 큰 숙제이자 화두이다. 잘 살아야하고 잘 죽어야 하는데 만만치 않다.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뒷산에 오르다 중턱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사람이 다가가도 꼼짝도 않고 배를 땅에 대고 앉아있었다. 자신의 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서인지 미동도 않고 붙박은 듯 머물러있다. 스스로 아는 걸까? 자신이 병들고 이제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소란도 피지 않는다. 어느날 태어났듯이 그렇게 조용히 스러지리라는 것을 동물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이반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의 생각은 섬뜩하지만 현실적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그 죽음이 나에게 불러올 변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다.

‘죽음으로 인해 각자의 머릿속에는 직장 내의 인사이동과 가능할 법한 변화에 관한 생각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1장은 이반의 죽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2장은 이반이 죽기 전 삶의 서사를 서술한다.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은 페테르부르크 관리의 아들이고 예심 판사로 새 도시로 옮겨온 뒤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하듯 결혼도 가뿐하고 유쾌하고 즐거우리라 믿는다. 하지만 아내의 임신 초기부터 모든 예상을 뒤엎고 점잖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아내는 아무런 동기도 없이 그의 혼잣말대로 드 게테 드 쾨르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드 게테 드 쾨르: 일부러



아무리 무시하고 친구들과 카드놀이판을 꾸리며 예의 그 유쾌함을 유지하려 해도 쉽지 않다. 아내는 천박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고 멈출 기세도 보이지 않는다. 이반은 이러한 파괴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업무를 핑계 삼아 독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다행히 두 직급이나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고 연봉도 높아졌으며 새집으로 이사도 했다. 무엇보다 모두 건강했다. 아내와 무엇을 해도 뜻이 맞았으며 집 꾸미는 일에 총력을 다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함없이 흘러갔고 좋았다.

모든 것이 좋기만 한 상황이 계속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반은 배가 불편하고 입속에서 이상한 맛을 느낀다. 불쾌한 기분이 심해지자 아내와 다투고 유쾌함은 사라진다. 이반의 고통이 서서히 시작된다.

여러 명의 의사를 불러 진찰해보고, 의사들은 휘황찬란하게 가닥을 잡은 듯 늘어놓지만 병세는 악화된다. 아무도 그가 바라는 위로를 해주지 않고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 것에 괴로움을 느낀다. 고통스럽고 혼미한 상태가 이어진다.


‘누군가가 그를 비좁고 깊고 검은 자루 속에 아프도록 처박은 채 자꾸 더 안으로 쑤셔 넣지만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락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불행을 모르고 살았기에 더욱 대비되는 이반의 괴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그는 질병을 고치겠다는 것에서 벗어나 왜 자신이 이런 끔찍한 고통을 받는지에 천착한다. 왜 이런 고통이 있으며 왜 자신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고통 앞에, 질병 앞에, 죽음 언저리에 가까이 있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나 상황이 되지 않으면 원망 어린 질문이 솟구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신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내리는 걸까?


이반이 아무리 사경을 헤매며 고통을 겪어도 다른 가족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심지어 아내,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는 남편이 죽기를 바란다.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러면 봉급마저 사라질테니 대놓고 바랄 수는 없었다.’

사흘간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신음하던 이반은 죽은 후 마음속으로 되풀이한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것은 더 이상 없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품격있게 살던 한 인간의 무너짐을 묘사한다. 일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어떻게든 질병을 이겨보려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자존심 강한 고등법원 판사지만 게라심이라는 젊은 농군에게 최고의 위안을 받는다.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고 엉엉 울고 싶어한다. 인간은 모두 나약하고 여리다.

알고 보면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은 세상 같지만 아프면 외로워지고 혼자라는 것, 그리고 죽음 앞에 놓여있다는 것은 참으로 자로 잰 듯 공평하고 공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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