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민음사/ 2003
나쓰메의 작품 ‘도련님’을 읽고 우연히 발견한 책, ‘그 후’
제목으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어 호기심이 일었다.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 쉽게 손이 갔다.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읽기 잘했다는 생각과 약간의 아쉬움이 혼재한다.
폭풍처럼 마구 달려갔는데 그 끝에 열린 결말은 단 꿈을 꾸다 깨어난 현실과도 같았다.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열린 결말의 작품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이스케는 돌봐주는 사람 두 명과 한가롭게 생활한다.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자신만의 철학으로 삶을 밀고 나간다. 비난받아 마땅한 얘기 같지만 한켠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의식주에 곤란을 겪지 않는 사람이 흥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진실 되게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순수해도 너무 순수한 거 아닌가? 친구 히라오카는 돈 있는 부잣집 도련님만이 돈에서 자유로워 신성한 노동을 할 수 있다며 비아냥거린다.
히라오카는 어릴적부터 알던 친구인데 다이스케가 좋아하는 여인 미치요와 결혼한다. 지방에 내려가 생활하다 실패를 안고 도쿄로 돌아온다. 본격적인 스토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살림이 궁해 부인을 시켜 돈을 융통해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다이스케 또한 자신이 번 돈이 아니고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본가에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 이번에는 형수에게 쓴소리를 듣는다. 아무리 훌륭해도 도련님은 인력거꾼과 같다는 둥, 친구를 도울 능력도 없다는 둥 모멸감을 준다.
유일하게 위안을 받는 것은 미치요라는 존재이다. 히라오카가 있든 없든 남의 부인을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핑계는 만들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혼자 감정을 키워오다 결국 폭발 직전까지 간다. 계속 히라오카를 속일 수 없고 무엇보다 자신안에서 내는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다.
급기야 미치요를 집으로 불러 백합 같은 여인에게 고백한다. 심장병이 있고 출산한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갔고 남편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힘든 여인, 미치요. 다이스케는 그녀를 계속 사랑해왔다. 마음에 품은 것을 소리 내어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드디어 다이스케는 감정을 쏟아낸다. 고백을 들은 미치요는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냐며 원망 섞인 울음을 터뜨린다.
다음은 미치요의 남편 히라오카가 남아있다. 오랜 친구인 그에게 어떻게 너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기에 결국 실토한다. 미치요를 나에게 달라고 말한다. 히라오카는 “주지” 라고 짧게 응대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이 안 좋으니 돌봐준 후 준다는 얘기다.
얼마 후 본가의 형이 찾아와 편지를 내민다. 히라오카가 다이스케의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와 형은 다이스케와 인연을 끊겠다며 강수를 둔다. 더불어 모든 지원도 끊어지는 것이다. 직업도 없고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다이스케는 이 상황을 아픈 미치요와 어떻게 헤쳐나갈까? 그리고 미치요와 함께 살게 될까? 히라오카는 어떤 복수를 할까?
그 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직업을 구하러 나간 다이스케에게 온통 세상이 새빨갛게 보였다는 결말만 나와 있다.
이 이야기는 스토리만 놓고 보면 불륜이다. 우리가 항상 묻는 질문, '불륜은 미화될 수 있는가?' 히라오카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갑자기 친구가 부인을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인지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이다. 부인을 주겠다고. 지금은 안되고 병이 조금 나으면 그때 주겠다는 대답.
다이스케는 젊은 시절 친구가 미치요를 사랑하니 마음을 접었다. 친구 부부가 잘 살면 틈을 찾지 못했겠지만 힘들게 부부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자신의 연정을 펼쳐 보이고 싶은 용기가 생겼으리라. 본가에서 지원이 끊어져 힘들 것이 뻔하다는 토로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미치요를 보면 그녀도 다이스케를 사랑한 것이 꽤나 오래 된 것같다. 죽음도 각오하고 있다고 말한다.
히라오카와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느니 마음에 품고 있는 다이스케와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것일까? 결혼생활은 둘이 약속한 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지켜가는 것이 맞다. 그런데 히라오카와 미치요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부인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까?
히라오카의 잘못으로 미치요가 불행해 보인다는 다이스케의 말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결국 모든 것은 가장인 너의 잘못이니 부인을 데리고 살 자격이 없다. 경제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하고 애정도 충분히 주지 못해 미치요가 불행해졌으니 이제 나에게 달라는 다이스케의 말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언뜻 보면 둘은 순수한 사랑을 하는 듯 보인다. 남편이 없는 틈을 타 몰래 만나기를 시도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런 남자를 집에 들이는 행위는 나쓰메의 수려한 문체와 이야기구성으로 마치 자연스러운 사랑인것처럼 그려진다. 종국에는 히라오카는 나쁜 남편이고 다이스케는 정의의 사자처럼 미치요를 구출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아무 대책도 없다. 미치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책 읽고 산책하고 사교활동만 하던 다이스케가 마음만으로 아픈 환자인 사랑하는 여인을 잘 돌볼 수 있을까? 차라리 옆에서 지켜보면서 미치요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치요는 다이스케와 있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여인이다. 가시밭길을 선택한 이 둘의 '그 후'는 어떨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실존하는 인물들의 말로라도 되는 듯 이리저리 상상해본다. 세속적인 눈으로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면 이들의 사랑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