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반]
내가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전적으로 뇌에 달린 문제다.
무언가를 읽고, 보고, 겪고 나서 ‘이건 글로 써볼 만하겠는데’라는 판단은 아무래도 이성적인 대뇌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 그러면 이번 글은 ‘정치적 올바름’을 주제로 해야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찾아보아야 하지? 고민하면서 자료를 뒤지는 것도 계획적인 대뇌에서, 그리고 자료를 취합해서 발췌하여 읽는 일도, 하나의 완성된 글의 얼기를 짜는 일도, 논리를 맞추는 일도 그리고 글자를 하나하나 써 내려가는 것도 모두 아주 이성적이고 (물론 약간의 격한 감정이 필요하긴 하다) 논리적인 인간 주체가 하는 일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뭔가를 써야겠다고 하는 다짐은, 나의 뇌가 언어로 표현된 문장을 내놓기 전까지는 내장감각으로 체현된다. 그러니까 그건, 심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뭔가 울렁울렁하는 느낌이 단전에서 힘을 모으고, 그 울컥한 느낌을 단시간에 뇌로 쏘는 감각이라는 거다.
윤아랑 평론가는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서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지는 욕구는 그 무언가를 접한 후 시작되는 배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언어로 해명하려는 욕구일 것”(p.65)이라고 말한다. 문단에서 인정받는 등단한 평론가와 대중 앞에 먼저 나서서 아마추어 장에서 인정받은 인플루언서로 자신을 설명하는 윤아랑 평론가는 1부에서 제도를 거치지 않으면 제도를 비판할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적인 등단제도에 대하여 비판한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의 웹진 출판N vol.35(2022. 08)의 커버스토리의 주제는 ‘신춘문예의 몰락’이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신춘문예에 대한 의심스러운 시선들 - 신춘문예는 과연 몰락하는가?>에서 원고 청탁의 주제가 “신춘문예의 몰락: 신인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한국 문단의 구조적 현실”이라고 밝히며 신춘문예 제도에는 명과 암이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아직 제 기능을 하는 영역이 존재하나, 계속 구조를 유지한다면 심사위원들의 입맛이 맞는 천편일률적인 작품들만이 등장할 것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의 분야에서 신춘문예의 대안으로 독자들이 직접 책을 만드는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는 형식의 크라운드 펀딩과 누구나 작가가 되어 소설을 연재할 수 있는 인터넷의 1차 플랫폼이 제시된다. 그렇다면 ‘비평 분야의 대안은 무엇이 있는가?’란 질문에 윤아랑 평론가는 트위터, 블로그, 왓챠의 100자 평과 같은 SNS 자체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자신도 인플루언서로 활동했던 왓챠를 예로 든다.
누구나 그럴듯하고 멋있어 보이는 짧은 문장으로 전문가처럼 영화를 평할 수 있는 공간.
공감을 얻은 감상평에는 좋아요와 댓글이 달려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영화 평론가를 보면서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동하는 곳.
저자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느꼈던 경험을 너무나 진솔하게 설명한다. 댓글로 다른 이들의 평을 비판하고 다니며 또 다른 이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플루언서로의 경험은 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날 것의 인정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 진짜를 찾고 진짜 옳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편파 된 고양감은 높아만 간다. 그 공간에서 바라보는 주류와 등단제도는 아무래도 ‘오래된 꼰대들만의 그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반대되는 두 입장이 서로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분은 영화를 보고 느낀 몸의 감각에 의거하여 글을 쓰게 하고 이 글은 나-영화-세상의 관계를 맺는 시발점이 된다.
글쓰기의 기본은 순수한 몸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어차피 세상은 똥통이기에, 세상이 똥통임을 인정하고, 이 똥통에서 언어로 나의 부글거리는 기분을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로 말해지지 않은 기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정치적 올바름을 갖춰야 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콘텐츠를 수용하는 일은 옳지 않은가?
위의 질문은 내게 언제나 ‘뭔가 부글거리는 기분’을 선사한다. 나의 내장감각이 체현한 질문은 옳지 않은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제작자들과 그것을 문제없이 수용하는 대중들을 향해 날을 세웠다.
조던 피터슨과 스티븐 프라이, 그리고 마이클 에릭 다이슨과 미셸 골드버그의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토론을 옮긴 책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2019, 프시케의 숲)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소수자들을 차별, 배제하는 언어 사용 및 표현을 지양하자는 신념, 혹은 그에 기반한 사회운동”(p.5)이라고 정의한다.
단어에 대한 정의만을 두고 본다면, 굳이 PC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쁜 일인가? 아마도 이 정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도에 달려있다. 누군가는 과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조던 피터슨은 극좌파의 과도한 PC함이 대학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고 말하고, 미셸 골드버그는 도대체 어느 공간에서 PC함이 과도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느냐고 말한다.
올해 고전이라고 칭송받는 작품들 속의 여성혐오를 조명하는 책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2023, 문예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총 8명의 저자가 고전 작품을 하나씩 맡아 그 소설 안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현재의 혐오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지를 다룬다.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읽기하는 작품은 이상의 <날개>부터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까지 동서양을 아우른다.
그러나 이 책의 출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갈린다. 부정적인 반응은 주로 고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므로 현재의 입장에서 비판할 필요성이 없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투영한 채 작품을 읽는 것은 오독의 위험성을 높인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이 책이 ‘과도한 PC함’을 가진 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는 이제야 발화되는 기다려온 소수자의 발언이다.
여자를 모욕하는 고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전이라는 위상을 등에 업고 무비판적으로 읽히는 까닭에,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혐오의 논리를 계속해서 퍼트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고전들에게는 현대의 시각에서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양한 시각의 비평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오독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왜 그들은 새로운 관점의 비평서에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부여하는가?
PC함이란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향해 공격성을 지닌 채 발화되는 단어였다. 그러나 현재에는 보수주의자가 진보주의자를 공격하는 단어가 되었다. PC함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되어 새로운 사회의 논쟁거리가 된다.
조던 피터슨은 집단주의적 태도를 부족주의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 비교한다. 그러나 발화 당사자가 이성애자 백인 남성임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가 비판하는 소수자들의 집단주의나 교차성에 대한 불필요성에 대한 논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PC함이라는 이유로 독선적으로 의견을 묵살시키고, 단체로 비난을 쏟아내는 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기에 소통을 말살시키는 듯한 PC함을 진보로 볼 수 없다는 스티븐 프라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하지만, 프라이가 말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에 비해 반대의 행위, 즉 소수자가 차별받는 상황이 더욱더 빈번하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완전히 그의 입장 또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옳은 일 같다. 그러나 정도나 방식에 대해서 여러 사람 간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어서 질문이 생긴다. PC함을 추구하는 콘텐츠는 어떨까? PC함을 추구하지 않는 콘텐츠는 옳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예 혹은 아니요’라는 말로만 답할 순 없을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K-드라마 열풍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안에 여성 캐릭터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비판받기도 했다. 그 지점을 비판하는 입장에 대해서 대중들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품을 왜 스스로 까 내리느냐고 반문했다. 이는 고전을 여성주의적 비평으로 읽어내는 작업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리는 이따금 PC함을 내밀었을 때, 조용히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작품을 왜곡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함께 따른다. 그러나 진실로 작품에 대해 논의할 장을 축소시키고 획일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
작년 12월 종영한 tvN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는 동명의 프랑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를 리메이크 하며, 레즈비언 로맨스의 주인공 커플을 남성-여성 주연의 헤테로 로맨스로 바꾸었고, 게이 등장인물조차 사회의 고정관념을 덧씌운 모양새로 연출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무엇이 작품을 왜곡하는 시선이 될까?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를 지운 리메이크 드라마일까, 혹은 이 지점을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누군가에겐 과도한) PC한 관점의 비평일까?
언제쯤 배 속이 부글거리지 않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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