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는 의도되지 않았다면 절대 쓰이지 못했을, 아주 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장면들이 모인 드라마다.
남편을 끝까지 의심하다 죽게 만들었다며 자책하며 방구석에 틀어박힌 구경이와, 나쁜 놈들은 모두 죽여야 더 좋은 세상이 된다고 믿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경이는 의심과 확신을 넘나들며,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주 유사한 사고방식으로 정반대의 목표를 추구한다.
그때 이 두 인물을 가르는 선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분법적인 선악의 굴레가 아닌 각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살인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멍청함과 오만함이라고 말하는 구경이는 이경이만큼 똑똑하고 세상에 관심이 없고 게임 속 세상만 탐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이 세상에 죽을만한 사람은 없다.'라고 외친다.
그에 반해, 매번 뉴스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나쁜 놈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런 놈은 죽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듣는 이경이는 자신이 범죄자들을 죽임으로써 더 좋은 세상에 이바지한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왜 구경이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보아도 형이 너무 짧다, 저렇게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사법부는 범죄자를 너무 쉽게 용서한다. 시청자들은 이경이의 통쾌한 복수극을 보면 가슴에 막힌 응어리가 내려간 듯이 속 시원하다. '그래, 저런 놈들은 죽어야지.' 낄낄거리며 박수를 치다 구경이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구경이는 특유의 눈빛으로 그들을 빤히 응시하며 묻는다.
이거, 너무 의심스러운데?
그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 죽을만했을까? 죽을 만큼의 죄를 저질렀나? 아까까지 통쾌한 마음은 갑자기 사라지고 마음 한편이 슬슬 찝찝해진다.
죽이는 게, 맞나?
그럴 때면, 다시 이경이가 옆구리에 연극 대본을 낀 채 나타나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친다.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둔 성매매남, 불륜, 불법 촬영남, 불법 촬영 영상을 공유하는 사이트 관리자. 이경이는 이들이 살아있어야 하냐 묻는다. 이경이의 질문을 다양한 보기를 가진 질문으로 변주된다.
"소소한 범죄자 20명과 당신의 아들. 누구를 살릴 거야?", "당신의 아들과 당신. 누구를 살릴 거야?" 아무래도 이경이는 범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경이에게는 항상 답이 있다. 이경이의 질문을 답을 찾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 것뿐이다. 다른 이들의 대답으로 이경이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트릭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인 이모가 죽기 전까지.
이경이의 흔들린 확신은 아무에게나 가닿는 칼날의 끝으로 표현된다. 양 극단에 위치한 구경이는 자신을 믿어주는 팀원들과 어울리며, 오히려 점차 확신을 얻게 된다.
극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정말 구경이의 남편이 범죄자인지 아닌지, 산타가 구경이 남편을 죽게 만들었는지 아닌지.
극은 의도적으로 남자 캐릭터들의 누명을 벗기는데 한쪽의 대본도 할애하지 않는다. 남자 인물들은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구경이에게 트라우마를 주기 위한 장치, 구경이가 성장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정말 오랜만에 냉장고 안으로 남자가 걸어 들어갔다.
남편이 범죄자인지 아닌지 의심을 거듭하던 구경이는 산타의 과거를 알지 못하지만 산타를 믿는다. '산타'는 믿음으로 존재한다. 산타에게는 끝까지 이름이 없다. 그 인물은 구경이가 믿음으로써 존재가치가 생긴다. 산타는 구경이가 믿지 못하면 극 안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런 역할의 여성 캐릭터를 아주 많이 알고 있다.
작가는 의도적이다. 극 전반적으로 성범죄, 불법 촬영범죄, 성매매를 다루고 미혼모와 게이 커플을 등장시키지만 단 1초도 혐오적인 부분이 없다. 이 소재를 혐오 없이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을지, 사실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경이의 트릭 논리의 어설픔과 살짝의 유치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그건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다.
건욱 앞으로 온 택배 상자 안에는 무언가 무서운 것이 들어있을 것 같았다. 건장해 보이는 남자 셋이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는 와중, 구경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택배 상자를 연다.
이렇게 클리셰를 비트는 장면이 계속 등장한다. 단순한 성별의 반전이 아니다, 성별의 반전만으로는 당위성을 얻을 수 없다. 그 안에 성별 클리셰를 비틀기 위해 작가가 수고스럽게 엮어 놓은 아주 소소한 설정과 인물과 서사를 느끼면, 유치함은 극의 톤 앤 메너가 되고 <구경이>의 특색이 된다. (게다가 OST도 한 몫한다. 극의 유치함을 배경음악으로 메운다)
천진난만한 얼굴, 왜소한 체구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경. 연약해 보이고 사회적 고정관념의 렌즈를 끼고 본다면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워 보이는 어린 여자가 알고 보니 무서운 살인마이다.
이 설정을 생각하다 보니 드라마 <악마 판사>의 정선아가 생각난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저 여자보다 강하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선아는 대표를 손에 쥐고 흔드는 사회적 책임 재단의 실세였다. 그러나 여기서 차이는 생긴다.
꼭 사람들은, 저렇게 "천진난만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젊은 여자가 용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적(<구경이>의 경우 물리적) 위치를 차지하면 꼭 다른 인물을 통해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마 판사>는 선아를 '썅년'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고 그를 자리에서 추락시키는데 갖은 노력을 한다. 사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여자가 추락하는 일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러니 굳이 뇌를 움직여 사고할 필요도 없는) 창작자가 그리지 않아도 시청자들이 미리 그리는 뻔한 이야기일 뿐이다. 뻔하고 뻔하다. 창작자 직무유기 수준으로 뻔하다.
여기서 <구경이>는 다르다. 굳이 손 쓰지 않아도 시청자들이 납득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뻔한 혐오적인 클리셰는 없다. <구경이>는 그 이야기를 다시 쓴다. 이경의 추락은 이경이 어린 여자라는 특성과 전혀 무관한 상태로 진행된다. 사회면에서 "어린 여대생이 살인마였다"라는 흔해빠지고 상투적인 문장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경은 추락할 때 조차도, 하나의 인물로 소비된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이, 지금까지 모든 매체에서 너무 어려웠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넷플렉스 드라마 <마이네임>의 지우를 보자. 지우는 범죄자인 아버지 때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조직에 들어가기까지 한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이다.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서 머물던, 남자들만 가득한 숙소에서 지우는 간신히 강간당할 위기에서 벗어난다. 왜 꼭 여성 인물에게 가해지는 고난은 '성범죄'일 뿐일까.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스스로가 인물에게 위기를 주고 싶은데, 어떠한 서사를 부여할 때 고려된 것이 단지 성별일 뿐이라면 이제는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앞에서 아빠를 잃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조직에 들어가려고 했고, 또 조직원들은 그런 지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지우가 여기서 어떤 사건을 겪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또한 모든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이야기가 튀지 않고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고려되지 않으면, '강간'이라는 뻔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유는 하나다. 지우가 여자라서. 창작자 직무유기 수준이다. 여기서 지우는 '여성' 캐릭터다. 여성 '캐릭터'가 아니다. 여성 주인공으로 하는 누아르물. <마이 네임>의 사유는 여기서 끝난다. 왜 여성 주인공이어야 하고, 어떻게 여성 주인공 누아르물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구경이>는 12화를 통틀어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지어지는 위기나 무게가 없다. 솔직히 여자이기 때문에 가해지는 위기상황을 쓰면, 쉽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고 시청자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개연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지금까지 무수히 재생산되어 온 클리셰는 안전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모든 유혹을 떨쳐냈다. 그래서 <구경이>가 너무 소중하다.
<구경이>는 <마이 네임>과 달리 가볍고 유쾌하고 잔인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세상에 죽을만한 사람은 없다.'라는 주제의식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은 극은 <마이 네임>보다 사유가 쌓이고 무게감 있는 밀도 높은 작품이 된다. 이것은 극의 분위기와 연출(<마이 네임>의 연출은 최고다) 과는 전혀 상관없다.
뻔한 중년 남자 보스 말고, 용 국장을.
뻔한 남자 조력자 말고, 나제희를.
여성 주연극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는 남성 인물 말고, 산타를.
<구경이>의 인물은 사회를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 더 생각하고 꼬아보아야 등장한다. 그리고 이십 번은 더 고민해야 깨닫는다.
드라마에 삽입된 애니메이션, 연극적인 연출, 이경이과 구경이를 잇는 컷 편집, 극 분위기를 확장시키는 OST, 구경이를 클로즈업할 때마다 숨 막히게 하는 배우 이영애의 연기를 넘어서도 <구경이>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본인의 선택이 개입했다는' 이유와 '등장인물이 아닌 진행요원에 의해 죽어나가는 게임 규칙'이라는 자의성과 타의성이 섞여 데스 게임이라는 마이너 장르를 메이저로 끌어왔다. 신자유주의와 펜데믹이 겹쳐, 나의 목표를 위해 타인을 해하는 일이 긍정되어가는 아주 위험한 사유가 넘실대는 시기에 <오징어 게임>의 유행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21세기의 좀비물 장르가 '좀비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윤리적인 고민에서, '좀비라는 존재를 단지 장애물로 여기는 서사'로 흐름이 바뀌었고, 이 서사들이 신자유주의의 모토를 긍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인물이 선택했으니까, 아주 큰 보상이 쥐어지니까, 인물(나)이 직접 다른 이를 죽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징어 게임>에서 윤리적인 고민은 사라진다. 윤리적인 고민이 없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 게임을 즐긴다.
이때 구경이와 이경이의 대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럼 이제 다 없애도 되는 거네?
무슨 소리! 당연히 살아야지. 왜냐하면!!!
나쁜 놈들을 목숨 바쳐서 살려내는 구경이와 나쁜 놈들을 목숨 바쳐서 죽이는 이경이를 보라.
우리는 끊임없이 구경이와 이경이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을 멈추는 순간 세계는 데스 게임과 다르지 않다.
구경이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그러나 구경이는 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우리를 빤히 응시할 뿐이다. 카메라는 그런 구경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구경이의 표정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그의 눈이 액정에 한가득 찰 때면, 우리는 스스로 저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견지할 점은 간단하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구경이가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우리를 데스 게임 속에서 꺼내 줄 유일한 동아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