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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닌 디올(Dior)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크리스챤 디올(크리스티앙 디오르 Christian Dior)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의 디자인은 인기가 매우 많았다.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Legacy)은 패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그는 패션에서 여성성(Femininity)을 강조하였으며 럭셔리(Luxury) 패션을 추구했다.


전쟁 시기인 1920~30년대 여성복의 형태는 각진 어깨 라인과 좁은 치마로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디올(Dior)은 길고 풍성한 스커트와 부드러운 어깨 라인과 허리 등을 강조하는 여성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디올(Dior)은 혁신적인 디자인과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라이선스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으로 가장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다. 그가 디자인한 옷은 수많은 영화배우와 로열패밀리가 입었다. 그의 회사는 패션 산업을 이끌어 나갔다.  



디올은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고급 여성복을 제작하는 맞춤형 옷)에 처음으로 라이선스를 도입했다. 여기에서 그의 비즈니스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넥타이, 모자, 스타킹, 장갑 등의 제조업체에 빌려주고 로열티를 받았다. 도입 초기에는 주변 쿠튀르 하우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다른 쿠튀르 하우스도 라이선스 사업을 따라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은 1905년 1월 21일 프랑스 북부의 해변 마을 그랜빌(Granville)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디올은 비료 공장 사장인 아버지 알렉산더(Alexandre Louis Maurice Dior)와 어머니 이자벨(Isabelle) 사이에서 5형제 중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가족들과 함께 유년시절을 파리에서 보냈다.



디올(Dior)은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건축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디올(Dior)이 정치학을 공부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아들이 외교관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디올은 아버지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1925년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콜(École des Sciences Politiques)에 입학한다.


1928년 졸업 후, 디올은 아버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작은 아트 갤러리(Gallery)를 열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건 조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족 이름을 갤러리 문 위에 쓰지 않는 것이었다.


갤러리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디올의 갤러리는 점차 유명해졌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막스 자코브(Max Jacob), 장 콕토(Jean Cocteau),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등과 같은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도 취급할 수 있었다.


1931년 형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갤러리 문을 닫아야 했다. 디올은 자신의 패션 스케치를 팔면서 겨우겨우 먹고 살 수 있었다. 1935년 그는 매거진 Figaro Illustré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몇 년 후 디올은 Paris couturier(비싼 여성복을 만드는 디자이너)의 로버트 피켓(Robert Piguet) 디자이너 어시스턴트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장교로 복무한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디올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에서 일을 시작한다. 운이 좋게도 여기에서 디자인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남은 전쟁 기간 동안 Lelong 디자인 하우스는 계속해서 나치(Nazis)와 프랑스 부역자(공익사업을 위해 보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노동자)의 여성들에게 옷을 제공했다.


같은 기간 동안 디올의 여동생 캐서린(Catherine)은 프랑스 저항세력으로 일하다가 잡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다. 하지만 다행히도 1945년에 그녀는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다.







1946년 디올은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한테 투자를 받아 파리의 몽테뉴 거리 30(30 Avenue Montaigne)에 회사를 설립한다.(현재, 디올 회사는 1947년을 디올의 Opening-year로 여기고 있음) 처음에 마르셀 부삭은 디올이 필립과 가스통(Philippe et Gaston)에서 디자인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디올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했다.





1947년 디올은 몽테뉴 거리 30에 위치한 디올 본사에서 첫 디자인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인다. 이 스타일은 미국의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편집장인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It's such a new look.>이라고 표현하면서 뉴 룩(New Look)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바(Bar) 슈트는 뉴 룩의 대표적인 디자인



디올은 전쟁으로 억압된 소비 심리가 오히려 많은 여성들에게 풍성한 옷감과 화려한 스타일이 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측은 맞았고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옷감을 사용하여 사치스럽다는 주변의 비난도 많았다. 특히, 샤넬의 창업자 코코 샤넬(Coco Chanel)은 '여성을 잘 모르는 남자는 불편한 옷을 디자인할 수 밖에 없다.'라고 비난했다.



Only a man who never was intimate with a woman could design something that uncomfortable. / Coco Chanel



1957년 3월 4일 미국 '타임'지 표지에 실린 디올(Dior)



1957년 10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치다.


디올(Dior)은 몬테 카티니(Montecatini)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세 번째 심장 마비를 일으키며 짧은 생을 마친다.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 디올은 부삭에게 출자를 받아 본격적으로 쿠튀르 하우스를 시작)은 개인 비행기로 디올(Dior)의 시체를 파리로 데리고 오며, 디올은 프랑스 Var의 Cimetière de Callian에 잠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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