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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서구식 약국에서 시작, 시세이도

아리노부 후쿠하라(Arinobu Fukuhara)


1872년 일본 최초의 서구식 약국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품 브랜드

서양 기술과 동양 철학의 결합

예술과 과학의 만남




아리노부 후쿠하라(Arinobu Fukuhara)는 23살 무렵 해군 병원의 약국장으로 일했다. 당시 일본은 한방 의학이 주류였는데 시스템이 굉장히 열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열악한 의학 시스템을 개선하고 싶어 했다.



도쿄 긴자 거리 시세이도 © SHISEIDO



1872년 도쿄의 번화가 긴자 거리에 동료들과 함께 시세이도를 설립한다. 이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조제 약국이었다. 아리노부 후쿠하라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였지만 시세이도의 철학은 동양을 따랐다. 시세이도를 설립한 초기에는 운영하기 쉽지 않았다. 제품의 품질은 좋았지만 이전과 다른 약국 운영 방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시세이도 약국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시세이도(資生堂: Shiseido)은 중국 고전(I Ching: 역경, Book of Changes) 구절에서 빌려온 말이다. Shi Sei(資生)는 '모든 것이 태어난 곳'을 의미하며, Do(堂)는 '집'을 뜻한다. 다시 말해, 만물의 근원이 시작되는 곳을 의미한다.



셋째 아들 신조 후쿠하라(Shinzo Fukuhara)가 시세이도를 이어받다.

신조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두 명의 형이 죽게 되자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신조 후쿠하라 (1883–1948) © SHISEIDO


신조 후쿠하라(Shinzo Fukuhara)는 1883년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일본의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가르침도 받았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큰 형과 작은 형이 세상을 먼저 떠나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그는 치바 대학교(Chiba University)에 입학하여 약리학을 배운다. 졸업을 하고 약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정진한다. 졸업 후 2년 동안 뉴욕 외곽지역과 화장품 제조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회사에서 인정도 받으면서 화장품 제조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지식은 훗날 시세이도에서 화장품 개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건너간다. 파리에 머물면서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내며 사진, 미술, 디자인에 푹 빠지게 된다. 특히, 아르누보(Art Nouveau: 19세기 말 전통적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1913년 신조 후쿠하라는 학업과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쌓아온 국제감각, 화장품 제조법, 예술과 디자인 등을 시세이도에 녹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중에서도 회사의 아이덴티티와 마케팅 전략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의 예술가 친구들 중 일부는 시세이도 디자인 부서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기도 하였다.



시세이도를 상징하는 동백꽃(Hanatsubaki) 로고 © SHISEIDO



시세이도의 상징인 동백꽃(Hanatsubaki) 로고를 디자인 사람은 신조 후쿠하라였다. 이는 물그릇에 떠 있는 동백꽃을 형상화한 이미지이다. 동백꽃 로고는 시세이도가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가 되길 바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조정 작업이 있었지만 신조 후쿠하라가 디자인 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897년 화장품 사업에 돌입




도쿄 긴자(Ginza) 거리에 위치한 (좌) 시세이도 약국과 (우) 시세이도 화장품 건물 / 사진=시세이도 코리아 © SHISEIDO


시세이도 화장품 건물 1층에는 매장, 2층에는 화장품 제조, 3층에는 화장품 테스팅과 제품 디자인, 광고, 포스터 등을 제작하였다.



1897년 시세이도는 최초의 화장수 오이데루민(Eudermine)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화장품 사업에 나선다. 오이데루민은 도쿄 임페리얼 대학(Tokyo Imperial University)의 나가요시 나가이 박사(Nagayoshi Nagai)가 서양 의학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제품이다. 아리노부 후쿠하라는 약국을 운영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화장품 사업에도 과학적 기술을 적극 이용하였다.



(좌) 1897년 오이데루민(Eudermine), (우) 1918년 오이데루민(Eudermine) / 사진=시세이도 코리아 © SHISEIDO



오이데루민(Eudermine)은 그리스어로 '좋은 스킨'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 화장품 이름은 일본어였다. 그러나 시세이도는 화장품 이름도 외국어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아 서양 문물에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또한, 오이데루민은 레드와인을 연상시킨다 하여 '빨간 물(Red Water)'이라는 애칭도 있었다.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제품으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일본 최초로 치약, 탄산수, 아이스크림을 팔다



후쿠하라 위생 치약 © SHISEIDO


1880년대 일본에서는 파우더 치약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파우더 치약의 거친 알갱이 때문에 치아에 손상이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사람들의 불편함을 인지한 시세이도는 일본 최초로 고체형 치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후쿠하라 위생 치약(Fukuhara Sanitary Toothpaste)은 부드러우며 치아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 가격이 파우더 치약보다 10배나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판매량을 보였다. 치석을 용해시켜 입 냄새를 제거하여 사람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아리노부 후쿠하라는 학업과 여행을 위해 미국과 유럽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한다. 서양에서는 약국에서 탄산수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탄산수 기계, 스푼 등을 수입하였다. 그리고 똑같이 재현하여 시세이도 약국에도 탄산수와 아이스크림을 판매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탄산수와 아이스크림은 생소했기 때문에 금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졌다.



1917년 레인보우 페이스 파우더(Rainbow Face Powder)



1917년 레인보우 페이스 파우더 © SHISEIDO



1917년 시세이도는 레인보우 페이스 파우더(Rainbow Face Powder)를 도입하였다. 당시 일본 여성들은 하얀색 페이스 파우더만 사용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곱 가지 색 레인보우 페이스 파우더 제품이 출시되자 여성들은 열광했다. 각자의 피부 톤에 맞게 일곱 가지의 색 파우더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품 용기는 하얀색 새틴으로 제작되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었다. 꾸미기 좋아하는 여성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여성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무척 좋아했다. 특히, 당시 게이샤들 사이에서 레인보우 페이스 파우더가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1917년 시세이도 최초 향수 출시


시세이도 향수 © SHISEIDO



1910년대 일본은 주로 프랑스에서 향수를 수입하여 사용했다. 일본 내에서 향수를 제조하는 회사가 없어 가짜 향수와 모조품이 난무했다.  그래서 신조 후쿠하라는 꽃을 이용하여 시세이도 향수를 제조하기로 한다. 1917년 동백꽃 향수가 시세이도가 만든 첫 번째 향수이다. 예술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났던 신조 후쿠하라는 꽃을 금박으로 새겨 넣은 화려한 병에 향수를 담아냈다. 또한, 향수의 화려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1918년 일본을 대표하는 크림, 콜드크림 출시



콜드크림 / 사진=시세이도 웹사이트 © SHISEIDO



1918년 시세이도는 첫 번째 콜드크림(Cold Cream)을 출시한다. 고가의 원료를 사용한 제품으로 피부 개선 효과에 뛰어났다. 고품질의 콜드크림이 단숨에 인기가 많아지자 시세이도의 명성과 신뢰도도 함께 높아졌다. 다른 화장품 회사들도 콜드크림을 출시했지만 시세이도 제품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했다. 시세이도는 최신 기술을 이용하여 콜드크림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명성을 오랫동안 이어나가고 있다.



1923년 체인 스토아 시스템 도입



체인스토어 © SHISEIDO



1910년대 화장품 판매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화장품 소매업자들은 극심한 경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1923년 시세이도는 체인 스토아 시스템(Chain Store System)을 도입한다. 이 시스템의 구조는 가격을 엄격히 책정하여 유통업자와 소매업자에게 합리적인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체인 스토아 시스템은 화장품 시장에서 효과가 있었다. 시세이도와 계약을 맺은 소매업자의 수는 예상을 훨씬 웃돌아 가격 경쟁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소비자들은 어떤 매장에서든 동일한 가격으로 시세이도 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924년 시세이도 월간 매거진



(왼쪽부터) 시세이도 게뽀(1924), 시세이도 그래프(1933), 하나츠바키(1937) / 사진=시세이도 웹사이트                                    



시세이도 게뽀(Shiseido Geppo)은 일종의 월간 매거진이다. 이것은 1924년 화장품 업계에서 최초로 발행된 것이다. 전국의 시세이도 체인 스토아 매장을 통해서 매거진을 배급하였다. 매거진에는 건강과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또한, 매거진에는 서양의 패션과 뷰티 정보뿐만 아니라 긴자의 여성들 스냅사진도 실었다. 사람들은 매거진을 통해 트렌드를 파악하고 서양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세이도는 매거진을 발행함으로써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1933년 시세이도 그래프(Shiseido Graph)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1937년 하나츠바키(Hanatsubaki)로 다시 한번 바뀌었다.



1932 럭셔리 브랜드 디럭스(De Luxe)



De Luxe © SHISEIDO


사진=© Visualizing Cultures MIT



1932년 시세이도는 럭셔리 브랜드 디럭스(De Luxe)를 출시한다. 그런데 미국의 비누회사 럭스(Lux)와 상표권 문제로 제품명이 디럭스가 아닌 드루(Drew)였다. 이후에 문제가 해결되면서 제품명 디럭스(De Luxe)로 유지된다.


초기 디럭스 패키지는 5개의 제품으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 립스틱과 향수도 추가하였다. 디럭스 패키지는 일반 화장품보다 3~4배 비쌌다. 이는 프랑스 사람에게 선물해도 좋을 정도로 럭셔리 브랜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디럭스(De Luxe)는 사치품으로 간주되어 생산이 중단되었다. 1951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제품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디럭스는 럭셔리 브랜드로 취급되지는 못했다.



1934년 미스 시세이도(Miss Shiseido)



1934년 미스 시세이도 / 사진=시세이도 웹사이트 © SHISEIDO



1934년 신문 광고에 응모한 240명 여성 중 9명이 미스 시세이도(Miss Shiseido)로 뽑힌다. 그녀들은 메이크업, 스피치, 패션, 서양 문화와 매너 등 뷰티와 관련된 수업을 7달 동안 받는다.


그녀들의 첫 공연은 'Theatre of Modern Beauty'에서 이루어졌으며 관객석에 젊은 여성들과 세련된 부인들로 가득 찼다. 공연이 끝난 후 9명의 미스 시세이도는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녀들은 가장 최신의 뷰티 정보를 알려주고 고객들에게 맞춤형 뷰티 컨설팅도 해준다. 이것이 미스 시세이도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시세이도는 글로벌 화장품 회사 톱10에 드는 거대한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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