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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글 Jul 19. 2017

당신이 몰랐던 부채의 또 다른 용도

교복을 입은 청소년 몇 명이 단상에 올라갑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앞에서도 학생들의 목소리는 또렷합니다. “고등학생도 무상 급식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는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건네받고 청중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부채를 들어주세요!” 광장이 순식간에 초록색 부채의 물결로 덮였습니다. 지난 5월 광주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에서 벌어진 ‘부채 투표’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손에는 일제히 부채가 하나씩 들려있었습니다. 시민들이 직접 제안한 조례와 정책들이 1번부터 100번까지 빽빽이 적힌 부채입니다. ‘길거리 흡연 구역에 대한 홍보 강화’, ‘동 단위 야간 응급병원 지정 및 운영’... 100개의 제안들은 ‘정책 터널’에 게시돼 시민들의 스티커 투표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시민 총회가 열렸습니다. 중소상인, 장애인, 청소년, 마을활동가 등 제안자들이 안건들을 대표해 단상에 섰습니다. 부채는 시민들의 투표지였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부채의 초록색 면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황색 면을 들었습니다.

시민 총회에서 부채를 들고 찬반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모습.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

촛불 대신 부채를 들고 시민 개개인의 의사를 공론장으로 이끌어낸 직접 민주주의의 현장. 어떻게 시민들의 100개 제안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을까요?


시민 참여가 곧 축제다


지난 7일 서울시에서 열린 ‘마을이 민주주의다’ 토론회에 발표자로 참석한 이민철 광주시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장을 만났습니다.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에 정책 마켓 디렉터로 참여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민철 광주시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장(가운데). © WAGL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낯설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에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궁금하다.


“정치를 재밌는 놀이처럼 만들고 싶었다. 시민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유, 무슨 우리가 정치를 해요' 이렇게 말하실 때가 많다. 가까운 정치인이 없고, 또 정책이나 조례라는 말만 들어도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경험할수록 정치는 쉬워진다. 이전에 마을에서 활동하며 동네 주민들이 구 의원, 시 의원, 국회의원들을 분기마다 만날 수 있는 자리를 함께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던 주민들이 이젠 정치인을 편하게 대하면서 고충도 토로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을 TV가 아닌 바로 눈 앞에서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기회를 제공하자는 게 페스티벌을 기획한 의도였다.” 


-부채 투표가 이뤄졌던 시민 총회는 사전에 마을 민회에서 100개 제안을 뽑아내는 과정을 거쳤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야기가 모였는지?


“축제 2달 전부터 준비를 했다. 마을, 민회, 직장 단위로 10명 이상씩이 모이면 조례나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시민들이 정책이나 조례를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구 의원들과 각 분야 전문가들을 민회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배치해 도움을 주도록 했다. 이들은 민회에서 제안된 시민들의 정책을 업그레이드하는 역할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부채에 적힌 100개의 제안이 모였다. 이후에는 사전 총회를 열어 중소상인, 장애인, 청소년, 마을활동가, 외국인 공무원, 청년을 대표하는 8개 정책을 선정했다. 선정 기준은 투표가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책을 선정하는 데 있었다. 이 내용들에 대해 시민들이 부채 투표로 찬반을 표시하고 토론을 거쳐 통과 여부를 결정했다. 


행사에서 사용된 부채. 민회를 통해 모인 시민들의 100개 제안이 적혀있다. ©WAGL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핵심은 시민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페스티벌 중 시민 총회가 가장 호응이 컸다. 이유는 주인 의식이 생겨서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앞에 나가서 직접 제안을 하고, 부채로 찬반을 표시하고,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연대감이 생겼다고 본다. 총회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은 대부분 통과가 됐다. 특히 고등학교 전 무상급식 실시, 부모 자격 인증 교육 활성화 및 부모 자격증 발급은 현장에서 고등학생과 엄마가 대표자로 나와서 직접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선정된 내용이다. 내가 제안하고 이웃과 함께 이야기한 내용이 통과되니까 시민들이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축제라고 생각한다.”



100개 제안이 전시됐던 정책터널의 모습.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급식 실시 제안은 큰 호응을 받았다. ©WAGL


시민들은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시민들만 제안한다고 해서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는 건 아니지 않나.


“시민과 정치인 간 권력의 차이가 있다. 권력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다. 지나가는 시민 A보다는 정치인들이 제안을 정책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시민 정책 마켓에서 VIP 고객은 시장이나 구청장 같은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이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페스티벌에서는 시장, 의회, 교육감 등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발언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행사를 설계하려 노력했다. 보통 행사에 가면 정치인들이 마이크를 주로 잡는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시민들이 마이크를 잡았고, 정치인들이 2시간 넘게 앉아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시민들의 모든 제안이 정책이 되기는 어렵지 않나? 조례나 정책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모든 제안이 모두 현실화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추진해야 할 정책들은 추진하고, 만약 그렇지 못한 내용들이 있다면 피드백을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예컨대 페스티벌에서 열린 시민 정책 마켓에는 28개 정책이 전시됐다. 이 중 11개 정책이 시장 구청장, 시와 구의 의회의장, 시민단체 대표와 매칭돼 정책 구매 약정서를 체결한 상태다. 각 마을 민회에서 제안된 100개 제안들도 사안 성격에 따라 검토 중이다. 국가가 해결해야 할 정책들은 광화문 1번가에 제안했다. 광주시가 해결해야 할 정책들은 해당 부서별로 검토하고 있다. 8월 말쯤 시민들에게 어떻게 추진할지에 대한 보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정책과 정치는 다르다. 그러나 정책은 정치의 현실적인 얼굴이다. 시민들이 제안을 해도 되는 게 없다고 느끼면 정치에 참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시민의 요구가 현실로 이어지는 것이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의 핵심이다.”


금남로시민정치페스티벌의 플랜카드. 이번 축제는 '정책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는 슬로건으로 진행됐다. ©WAGL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중우정치나 집단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이 만나면 그냥 자신의 이야기나 욕구만 말하기 쉽다. 나는 차가 필요해, 나는 집이 필요해, 이런 식으로. 그런데 열 명이 모이면 달라진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야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힘이다. 이번 행사에서는 무조건 열 명 이상이 모여서 토론을 해야 제안을 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했다. 그랬더니 실제로 시민들이 내놓은 의견이나 정책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예컨대 중소상인 민회에서는 광주시 상권 영향평가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는데, 본인들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익까지 고려한 내용이라서 놀라웠다. 시민들은 언제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부채가 아닐까요. 촛불의 거대한 파도가 권력을 바꿨듯이, 이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부채질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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