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날
피 말리는 하루 속 생존자의 일기
"Surv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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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테리아에서 동료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서로를 생존자라 부르며 어색하게 웃었고 주워들은 소식을 전했다. 항상 크림치즈 베이글을 주문하는 A는 오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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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와상을 물고 랩탑을 켰다. 어제 요청한 퇴사자 명단이 들어와 있다. 우물거리며 스크롤을 내린다. 스크롤이 계속 내려간다. 곳곳에 보이는 익숙한 이름들. 드래그를 해보다 포기하고 단축키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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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업체에게 보내는 메일에 'Urgent'란 단어를 제목 맨 앞에 넣었다. 이 단어로 시작하는 메일을 받으면 짜증부터 나기 마련이다. '송구스럽지만'이라고 문장을 시작하려다 이내 지웠다. 사실 나는 송구스러울 게 없다. 평소에 적는 안부인사를 일부러 생략하고, 가장 딱딱한 단어들을 고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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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첨부된 리스트에 적힌 직원들을 시스템에서 삭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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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3 문장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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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즈란 단어를 썼지만 읽어보면 무뚝뚝한게 싸가지 없는 갑이 쓸만한 메일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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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회의 일정이 꽉 잡혀 있다. 사장단은 오늘 '심사숙고한', '어려웠던', '재건'등의 단어를 평소보다도 더 자주 쓴다. 내년이 되기까진 아직 꽤 남았지만, 이미 다음해 전략과 부서구성을 끝마쳐 놨다. 프레젠테이션은 훌륭했고, 나는 박수를 치고 있다. 사실 나는 이번 결정을 지지한다. 최근 산업동향과 정치상황 반영, 보다 효율적인 자원 분배.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몇번이고 같은 결정을 내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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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부전공인 생물학과 경제학의 유일한 공통점은 경쟁을 기저에 깔고 간다는 것이다. 자연도태는 고등학교 때 배우기 마련이고, 적자 회사는 시장에서 퇴출당한다는 모델은 1학년 첫수업에서 배운다. 어제의 구조조정은 두 과목의 응용과정이요, 심화수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공과목에서 배우지 않은 게 있다. 도태된 사람들. 대학교 4년동안 한번도 경쟁에서 밀려난 상황을 배운적이 없다. 나무의 색이 변한게 나비 탓은 아닐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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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 하얀나비들의 결말을 보았다. 침울한 분위기, 굳은 표정, 상기된 얼굴, 애써 억누른 감정. 결국 한 아주머니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항상 웃으며 가끔 점심을 같이 먹던 분. 3년 동안 오피스에서 누가 우는걸 처음 봤다. 아니, 그냥 살면서 엄마뻘의 백인 여성이 저렇게 서럽게 우는걸 처음 봤다. 건넬 말도 찾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멀리서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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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완전히 갈색이 되어버린 나무엔 하얀 나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해고된 사람들이 십몇년간 써왔던 이메일 계정은 하루아침에 정지되었고, 각자의 가족사진이 붙어있던 책상은 깔끔하게 비어있다. 아, 아직 하나가 남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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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아침에 보냈던 메일에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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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찬님,
요청하신 사안이 처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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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사 온 맥주 두 캔을 꺼내놓고 고민했다. 뭐가 불편한걸까. 나는 경쟁에서 이겼고, 불평할게 없을텐데. 며칠 지나가면 다시 무뎌질 일이다. 아니, 무뎌져야 한다. 앞으로 몇십년 동안 더 자주 볼 일이다. 아니,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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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글은 픽션일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