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비놀이터-첫 번째 만남
요즘은 크고 작은 모임들 속에서 ‘느슨한 연대’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있다.
무거운 이야기는 선뜻 꺼내지 않는다.
대부분은 가볍고 즐거운 시간을 통해 잠시의 쉼을 얻으려 한다.
나 또한 같은 마음으로 ‘숨비놀이터’에 참가했다.
< 숨비놀이터 >는 해녀가 물 위로 올라와 처음 내쉬는 숨, ‘숨비’에서 착안해
청년들이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마련된 시간이다.
예산 봉대미산의 여름과 가을을 따라 걷고 바라보며
떠오르는 감각과 장면을 글, 그림, 사진, 색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무더위가 이어지던 여름, 주최자 두 사람을 제외하면 네 명이 자리에 모였다.
폭염경보 속 숲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선뜻 참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숲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오히려 신청의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선택한 우리 넷은, 저마다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왔을까?
모임은 책방이라는 실내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각자 간단한 소개를 나눈 뒤,
앞으로 열 번에 걸쳐 진행될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다.
(숲 방문, 숲 소리채집, 사진, 그림, 기록, 옥상텃밭 가꾸기, 제철음식 만들어 먹기)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첫 프로그램의 목적지인 산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시원한 바람과 나무 그늘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걷고, 사진을 찍으며 마음 가는 대로 장면을 담았다.
여름에서 가을까지의 순간을 기록하게 될 이 여정의 첫 장면이었다.
각자의 프레임에는 어떤 풍경이, 어떤 마음이 담기게 될까?
도착한 곳은 숲 속 체육공원을 조성 중인 현장이었다.
주최자가 사운드 채집 장비를 나눠주며, 자유롭게 숲의 소리를 들어보고 담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매미의 울음소리와 주변 공사 소음이 거슬려 들렸다.
‘다른 소리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실망하려던 찰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걸음을 옮기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발에 밟히며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집중해서 들어보니, 숲은 이미 많은 소리들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귀를 기울이다,
우리는 다시 모여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소리채집 중에 주어 온 작은 돌멩이에,
각자가 눌러 담고 살아온 감정, 지워내고 싶었던 기억들을 색과 선으로 표현했다.
말보다 먼저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음은 돌 위에 조용히,
그러나 또렷이 남았다.
작업이 끝나자, 자신의 돌멩이에 담긴 이야기를 한 명씩 나누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일상, 사라진 열정, 소소한 행복에 대한 바람, 자연이 주는 평온함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리고 정민(가명)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분노와 상처, 우울함을 담아낸 돌멩이를 내밀며
가족과 직장에서 보낸 힘든 시간들을 꺼내놓았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슬픔과 분노가 여전히 마음 안에 공존하는 듯했다.
이야기를 마치며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 꺼내서…”
그 순간,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고마워요. 그렇게 용기 내줘서요.”
정민은 우리의 반응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건 괜히 꺼내면 분위기 흐릴까 봐 걱정됐어요.
다들 힘든데 굳이 제 얘길 꺼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그게 참… 힘들었어요.”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이는 자신도 그런 시간을 지나왔다며
작은 숨을 내쉬듯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보려는 몸짓이었고,
그 선택은 분명 용기 있는 일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정민에게 건네는 말속에
사실은 오래 전의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을 담고 있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선택은 너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건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그 말들이,
그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머물던 이야기들이
작은 용기를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듣지 못했던 우리 각자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위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