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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터 Nov 26. 2023

5천 원짜리 베트남 숙소에서 생긴 일

불편한 여행을 기꺼이 견디는 여행가들의 이야기

새벽 1시 호찌민 공항에 도착했다. 밖은 어둡고 공항에 있는 음식점과 매점들은 모두 문을 닫은 터라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밤늦게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시내에 있는 숙소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1박에 5천 원이라는 미친 가격에 혹하고 만 것이다. 더 늦은 시간이 되기 전에 빨리 공항을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수화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것만 아니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승객의 짐 전부가.


수화물 벨트 앞에 있는 노란색 가이드라인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기도 하고 벽에 기대서 포기한 듯 몸을 누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구석에 앉아 아무것도 얹지 않고 빈 벨트만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호찌민까지 오는 데 걸린 5시간보다 더 긴 듯한 시간을 견디자 짐 한두 개가 입구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으로 나의 배낭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알던 배낭의 모습과 달랐다. 분명 형광 연두색 레인 커버를 씌워서 보냈는데 커버는 온데간데없고 검은색 배낭만 덜렁 나왔다. 하필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온다는 동남아 우기 여행의 시작부터 레인 커버를 분실하다니 불길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가방을 메고 공항을 나섰다. 


새벽에 도착한 호스텔의 모습


몇 번의 흥정 끝에 택시 앱 ‘그랩’의 비용으로 숙소까지 데려다준다는 택시 기사의 차에 탔다. 불 하나 없이 컴컴한 도로를 적막 속에서 달리니 무서웠다. 혹시 납치되는 건 아닐까 이상한 상상마저 들었다. 돈 없는 여행객임을 어필하기 위해 배낭 커버 파는 곳을 아냐고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난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알겠다는 의미로 씩 웃고는 가방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착한 택시 기사는 숙소 앞에 택시를 세우고 짐까지 옮겨 주고 떠났다. 문제는 숙소 로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9 호스텔 앤 바'라는 호스텔 이름처럼 낮엔 카페로 저녁엔 바로 운영되기에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을 제외하고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당황해서 어슬렁어슬렁 하다가 내부에서 나오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그 친구는 밖으로 나갔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당황함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잠시 후 직원이 와서 체크인을 해줬다. 직원에게 건네받은 열쇠를 쥐고 계단을 올라갔다. 휴대전화 플래시로 간신히 방과 침대를 찾았다. 컴컴한 방에는 이따금 뒤척이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축축한 침구와 먼지가 쌓여있는 창문을 보니 5천 원이라는 가격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느라 너무 애를 썼기에 바로 잠에 들었다. 


호찌민 거리


다음 날 아침에 본 숙소는 생각보다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각층별로 방이 2개씩 있고, 발 냄새 방지를 위해 방 앞에는 신발장까지 있었다. 방안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왔는데 어글리 코리안이 된 것 같아 황급히 신발을 정리했다. 첫날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레인 커버를 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각자의 침대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스트들이 있었다. 머쓱해서 내 침대로 들어가려는 찰나 한 친구가 말했다.


“언니!”


뒤 돌아보니 아침에 인사했던 인도네시아 친구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싱가포르 친구, 아일랜드 친구와 통성명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도네시아 친구는 평소에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며 한국 여행 중에 만난 남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잃어버렸고, 공항 직원이던 한 남자가 빌려준 핸드폰으로 여행을 안전히 마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 직원이 시내까지 가는 버스도 알려주고, 귀국하기 전엔 커피도 한 잔 대접해 줬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 속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면서 설레는 표정의 친구를 보며, 친절한 한국인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억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본 나에게 유난히 친절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베트남 콩 카페


다음 날 아침, 아일랜드와 싱가포르 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숙소를 옮겨야 했지만,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 친구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근처 영화관에서 ‘엘리멘탈’을 보고 돌아오니 숙소엔 영국에서 온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다 같이 한국인에게 유명한 베트남 콩 카페를 가기로 하고 숙소를 나왔다. 영국 친구 중 한 친구는 환경운동을 한 명은 대학에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영화를 보고 왔다는 나에게 그들은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하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유명하지 않냐며, 본인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넷플릭스에서 내 작품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루에 5천 원짜리 호찌민 숙소는 지금까지 가본 숙소 중에 가장 불편한 곳 중에 하나였다. 욕실의 문이 잠기지 않아서 혹시 열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씻어야 했고, 꿉꿉한 침구와 청결하지 못한 청소 상태, 고장 난 에어컨으로 밤새 땀을 흘리며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과 나누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베트남의 풍경


호스텔 1층 카페에서 아침을 먹던 중 봉고차에서 여행객이 한꺼번에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말레이시아 친구가 말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이런 여행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여행지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숙소에서 자기도 하는 불편한 여행을. 나도 그렇다고 말하니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We are not tourists. We are travelers. Right?”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가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국적도 쓰는 말도 다른 우리들이 한 가지 말로 묶일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여행가” 나는 그 단어를 꼭 쥐고 살아가기로 했다. 호텔 대신 호스텔에 머물며 기꺼이 불편한 여행을 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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