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by wandoo

여느 때처럼 반려인과 매장 카운터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한다. 우리 사이 무선충전기에 누운 오래된 스마트폰은 매장 배경음악을 들려준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플리 썸네일. 이때의 알고리즘 플리 썸네일들은 톡톡 튀는 색감의 일러스트라 눈길이 가네. 이어지는 다음 이미지들도 작가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새로운 자극을 주어서 고개를 쓱 내밀고 가까이 본다.


혼잣말이긴 하지만 사실 반려인에게도 들렸으면 하는 뉘앙스로 "귀엽다." 감상을 표현. 반려인 입장에서 귀여운 게 너무 많은 나. 귀엽다를 너무 쉽게 내뱉는 게, 미적 감각의 기준으로 아쉬운 건지 "뭐가 귀여워? 설명해 봐."라는 예상치 못한 시험에 든다. 단지 ‘귀엽다’ 세 글자 말했을 뿐인데, 설명? 음... 세 글자로만 말했으니 설명이 필요할지도? 침착하게 답변한다. "어... 도트무늬에다가 밝은 초록 색감의 옷이 편해 보여서 귀엽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너는 귀여운 게 너무 광범위해. 이게 귀여우면, 네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 표현해 봐."


반려인의 의도는 크레이티브 한 걸 추구하는 나에게 상상하는 걸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거다. 큰 고민거리 중 하나. 그렇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귀엽다."라는 감상이 학습 의도로 이어지니, 귀엽다는 것이 잔잔한 일상의 즐거움에서 모호하고 강박적인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쉽게 귀엽다고 느끼면 안 될 것 같은. 역시 난 공부를 싫어해...


반려인의 말을 허투루 듣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표현하기 전 생각할 것 중 하나인, 나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한다. 나는 재밌는 걸 좋아하고, 내가 하는 무언가도 재미있길 바란다. 마냥 재밌는 걸 바라느라 진짜 맘을 돌보지 못했던 걸까? 돌이켜보니 나는 스스로를 믿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나의 감정을 무시했던 순간이 많다. 누군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푸냐라고 물어봤을 때,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다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날은 인스타 스토리에 ‘내가 지옥이면 모든 곳이 지옥이다.'라는 글귀를 쓴 이미지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반려인이 생각났다. 몸과 마음을 건강히 유지하려 노력하는 나의 옆에, 매일 죽고 싶다 이야기하는 그. 그는 지옥이라서, 모든 곳이 지옥이기 때문에 매일 수십 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데 귀엽다란 세 글자가 이끈 나를 직시하니, 그를 지옥으로 보는 내가 보인다. 혹시 내가 지옥이라 그를 지옥으로 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상대방을 그런 사람이라고 프레임을 씌우려 한 건 아닐까? 나는 정말 쓰레기일 수도... 구제할 수 없이 처참하다는 생각과 눈물이 넘친다.


한 달에 한 번 호르몬 변화가 있는 날이라 유독 이런 걸까 퇴근을 하고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잠들기 전, 반려인과 나란히 눕는다. 어둠 속 등 너머로 표정이 보이지 않는 반려인의 목소리. "있잖아. 뱃속에서 갑자기 방귀가 만들어지는 느낌 알아?" 질문이 반갑다. 그건 내가 참 좋아하는 느낌, 짜릿한 느낌. 질문이 반갑긴 한데, 잠들기 전 뜬금없이 하는 게 정말 웃긴다. 입술에 세로로 붙여진 의료용 테이프가 떼어지지 않게 손으로 누른다.


반려인은 영문을 모른 채, "ㅋㅋ왜 웃어...? 왜 웃는데~" 나는 상기된 채 대답한다. "나... 그 느낌 너무 좋아해!" 벅찬 고백. 반려인은 의아하지만, 반가워하는 리액션이 싫지 않은 듯 “그래?ㅋㅋ”라고 답한다. "나 그 느낌을 너무 좋아해서, 평소에도 그리워해. 배 위쪽에서 시작하여 대각선 아래쪽으로 무언가 이동하며 큰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그 느낌이 있은 뒤에 방귀는 정말 시원하잖아! “


신나게 이어간다. "최근에 그 느낌을 경험한 걸 정확히 기억해. 왜 그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냐면, 밤에 부엌 김치냉장고 앞에서 뭔가 하고 있었어. 조용하고 어두웠기 때문에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어... “ ”그 느낌이 왜 만들어지는 건지 과학적으로 궁금했어. 지피티한테 물어봐야겠다." 평소에 지피티 말을 맹신할까 걱정하는 반려인은 "그러다가 지피티한테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아니야?" 참으로 적절하다. 천재다. 격하게 동의하며, "맞네. 방귀에 대한 글이니까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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