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온 결핍 앞에서

12월의 끝자락.쌓여만 가던 결핍이 결국 눈물로 터져 나왔다.

by 잇다

어린 시절, IMF로 인해 우리 가족은 집을 옮겨야 했다.

이사 첫날부터 전기가 나가 근처 슈퍼에서 초를 사와 불을 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거실이나 부엌이라 부를 만한 공간은 없었다. 현관문을 열면 간신히 싱크대 하나가 있는 좁은 공간이 있었고, 그 양옆으로 방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부모님과 나는 안방에서 지냈고, 작은 방에는 언니가 살았다.

화장실은 집 안에 없었다. 여름에는 벌레와 더위 때문에, 겨울에는 얼어붙는 추위 때문에 씻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볼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할머니가 함께 살게 되면서, 언니는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낸 뒤, 조금은 나아진 또 다른 반지하로 이사했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개선’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춥고, 거실 없는 방 두 개짜리 집에 부모님과 나, 언니, 할머니가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나와 언니, 할머니 셋이 그곳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과 그리움을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고부 간의 갈등은 심각했고, 할머니는 위생 관념이 좋지 않아 집 안에 대변을 묻히는 일이 잦았다. 틈만 나면 언니와 나를 향해 '못된 년들' 같은 모욕적인 말도 서슴없이 하셨다. 그렇게 가난했고, 집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워 단 한 번도 친구를 집에 초대한 적 없이 그 시간을 지나왔다.

여섯 살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럼에도 그 10년 동안 아빠는 회복을 위해 몸을 갈아 넣듯 일하셨다.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 하루에 한 끼만 간신히 먹으며 일하셨고,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결국 다시 그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전에 쫓겨났던 바로 그곳으로.



그 시절은 내 기억 속에서 거의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살던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극복했다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지난한 10년을 부끄러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부모님은 자주 다투었지만 우리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다시 좋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 시간을 영웅담처럼 느끼게 했다. 인생의 고난을 이야기할 때 꺼내 들 수 있는, 나름의 서사처럼.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잘 나가던 아빠의 사업은 꺾이기 시작했다. 불안은 명확했고, 무너짐은 너무 잘 보였다. 버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무리한 투자 실패와 코로나를 거치며 다시 크게 꺾였다. 우리는 또다시 음침한 골목의 빌라로 이사해야 했다.


분노가 차올랐다.

왜 또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왜 아빠는 가족과 상의 없이 그런 투자를 했을까. 왜 늘 집값은 폭락한다며 월세만 고집했을까. 왜 내가 봐도 이상한 친구의 투자 권유를 믿었을까.

그 와중에 엄마는 부동산을 해야 한다며 주택조합에 가입했고, 사기로 수천만 원을 잃었다. 이후 조합원장을 고소하는 고소장이 날아왔고,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엄마 대신 내가 경찰서를 오가며 엉엉 울기도 했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무용담’은 더 이상 무용담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원망으로 변했다. 아빠와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싸웠고, 이후 2년 넘게 부모님과 왕래를 끊었다. 내가 믿고 있던 신에게도 처음으로 원망을 품었다. 부모님은 이제 늙었고, 더 이상의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린 시절 결핍을 겪었지만, 어린 나는 결핍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핍은 어른이 되어 한꺼번에 찾아왔다. 대학교, 대학원, 회사 생활, 그리고 미국에서의 삶은 계속해서 나의 결핍을 자극했다. 특히 대학원과 미국이라는 환경에서는 더욱 심했다. 어릴 적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는 지극히 소소한 이야기조차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가벼운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힘들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여권조차 없었고, 국내 여행도 가본 적이 없었다. 반지하로 내려간 이후 우리 부모님에게는 차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운전해줬다”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지금의 부족함들을 어린 시절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서른이라는 나이에 접어들며 분노는 조금씩 받아들임으로 바뀌었다.

어쩌겠어. 더 이상 비교하지 말자. 엄마 아빠도 정말 고생 많았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화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힘든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은 가라앉고, 우울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이미 다 묻어두고, 나름대로 잘 극복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5년의 끝자락, 가족 단톡방에서 아빠의 카톡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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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불안과 초조함, 기댈 곳 없는 듯한 막막함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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