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백으로도 마음이 안 풀려

합가를 대하는 마음 자세

by 따사로운
응? 왜?


다시 합가 한다는 내 소식에 친구, 친척, 직장동료들의 반응이다. 열이면 열 같은 물음이라 우리의 결정이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건가, 더 고민했어야 했나 잠시 마음이 동요한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분가했는데 갓 2년 지나 다시 합가라니. 나 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이긴 하다. 하지만 아버님의 투병과 하늘로의 부르심이라는 아픔을 보듬고, 어머님을 위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 가족이, 나와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버님의 병세가 심해지신 뒤로 우리 집은 놔둔 채 이미 몸은 함께 살았었던 시가에 들어와 있으니 '합가'에 대한 불편한 내 마음만 진정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마음만. 그런데 그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게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분가를 안 했다면 몰랐을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뼛속 깊이 알아버렸기에. 그러한들 어쩌겠는가, 그건 내 사정이고 현재로선 다른 방도가 없으니 받아들여야지. 일상을 함께 지내다 보면 아버님을 떠나보낸 아픔도 덧나지 않고 아물어지리라. 어머님도 덜 적적 하실 테고. 긍정회로를 계속 돌리면서도 한 날은 체념했다가 한 날은 신경이 곤두서고. 축 처진 어머님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음도 무너졌다가, 잔소리로 들리는 콕 찔리는 말씀을 하실 땐 폭발했다가.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게 실감되는 날은 답답함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낯선 감정변화에 마음을 다스리는 일. 그건 아직 단단하지 못한, 지혜롭지 못한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인 것이다.


봄과 여름사이, 커피 마시기 참 좋았던 날로 기억한다. 시가 대소사에 늘 참석하는 것도 모자라 다시 합가 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촌시누가 안쓰러워하기에 세상 참한 미소를 머금고 수줍게 "오빠가 맛있는 커피 사줬어요." 대답했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커피는 무슨. 가방이라도 하나 받아요." 내 귀에 캔디 마냥 제대로 꽂혔나 보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어머님 계시는 부엌에 시선을 두지 않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벌렁 널브러진 어느 날, 사촌시누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가방? 그래! 결혼할 때도 안 받은 명품 가방, 이참에 하나 들여보자. 없는 줄 알았던 물욕이 앞뒤재지 않고 차오른다.

오빠, 나 가방하나 사줘. 명품가방. 합가기념으로.
알았어. 골라봐.

역시나 든든한 남편의 대답이다. 든든한 대답만큼 통장잔고도 든든하면 좋으련만. 다 가질 수 없는 게 인생이지.


패셔너블, 쇼핑, 명품. 이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40년 넘게 살아온 터라 사 줄 테니 골라보라는 말에도 선뜻 고르기가 어렵다. 정보창고인 유튜브를 검색해 본다. 입문백 소개, 절대 후회 안 하는 템, 절대 사면 안 되는 템 등등 생각보다 많은 영상에 깜짝 놀랐다. 스크롤을 위아래로 옮기며 마음 가는 대로 몇 가지 동영상을 보며 명품백 세계로 들어가 본다. 사려고 치면 한도 끝도 없겠구나. 딱 한 개만 산다는 제한이 있으니 감사한 건가. 든든하지 못한 통장잔고도 아른거린다. 그런 중에도 검색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튀지 않고 무난하고 편안한 것만 찾는 스타일이랄 것도 없는 내 취향에, 첫 명품은 구찌지.라는 이상한 진리의 말씀이 박혔다(남편에 대한 배려가 커서인지 샤넬 이런 건 눈길도 주지 않기). 이렇게 한 가지로 마음을 정해야 다음 단계도 쉽겠지. 나보다는 쇼핑의 격이 있는 남편도 이것저것 검색해서 톡으로 보내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명품가방을 사야겠다는 의지도, 열망도 이내 시들해졌다. 여름, 가을, 겨울이 덧없이 지나간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큰 아이의 가방을 아울렛에 가서 사기로 했다. 구찌매장이 있는 아울렛을 알아보라는 남편의 한 마디. 아, 잊고 있는 줄 알았던 가방, 그냥 사지 말까 했는데 사는 거야?! 헤벌쭉 웃음이 난다. 내심 사고 싶었나 보다.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구찌매장에 처음으로 줄을 섰다. " 엄마 좋아?" 하며 의뭉스러운 눈웃음을 치는 아이의 말에 "그래, 좋다~" 맞장구쳐준다. 멋스러움을 뽐내며 자리를 잡고 있는 가방들을 둘러보고, 정중한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몇 가지 가방을 메보고 바로 골랐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를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과 사고자하는 가방의 분명한 콘셉트가 있기에 구찌매장에 다녀왔던가 싶을 만큼 빠르게 구매는 끝났다. 가방보다 두 배 세 배 큰 쇼핑백을 어깨에 메고 아이보다 신난 발걸음으로 매장을 나선다. "다른 짐은 줘도 구찌 쇼핑백은 안주네?" 남편의 말에 코 찡긋. 이렇게 나도 하나 장만한다. 구찌백.


구찌백은 상자째 쇼핑백에 담긴 첫날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방 베란다에 3주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살 때의 벅참은 어디로 간 건지. 상자를 풀어서 열어보고 싶지도, 메 보고 싶지도 않은, 시큰둥한 마음. 구찌백아,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 이렇게 푸대접받을 줄은 너도 몰랐겠지.

베란다를 들고 날 때마다 초록상자가 보인다. 합가 기념. 합가의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초록상자.


합가: 살림을 합치다


합가는 내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 합가를 해서 합리적인 것도, 불편한 것도, 같이 웃을 일도, 따로 속상할 일도 다분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일상 속에서 나를 다독일 시간과 여유를 꼭 갖는 일. 살림은 합쳤지만 나와 어머니 둘 다 적정선을 지킬 줄 아는 슬기로움. 삶의 자리에서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이해하며 살아내는 일. 상자 속에 있는 구찌백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