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련감자 러버라니
나는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이 좋은 것을 나만 알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욕하다 달려나간 아르키메데스처럼 즉각적이고도 열렬하게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곤 하는데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마치 미제 스텔스처럼 예고없는 폭격을 퍼붙곤 한다. 잠깐 판단을 멈추고 함께 이 사랑스러움을 묵상해보자고 해도 화난 로마병사처럼 날 살려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난 금요일에도 나는 아르키메데스가 내 친구는 고성능 스텔스가 되었다.
콘텐츠라고는 국산 예능만 취급하는 내 애국자 친구에게 사회 이슈와 리얼 트렌드라는 것을 한 번에 깨우치게 하기 위해 왓챠플레이 최고 인기작 <체르노빌>을 틀어주었는데, 글쎄 이 친구가 내 사랑스러운 발레리 레가소프를 보고는 “어머 저 사람은 막 캐낸 감자같이 생겼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감자라니
저 순수하고 열정적인
과학자의 얼굴을 보고
감자라니
자레드 해리스는 자레드 해리스야! 감자같은 소리
역대 드라마 최고 평점을 갱신하고있는 <체르노빌>같은 어마어마한 콘텐츠로 이렇게 체신머리 없이 배우 덕질이나 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저항 기재로써의 예술을 사랑해온 나로써는 적잖이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내 물리적 주변 지역에는 자레드 해리스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공감해주는 이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너무 슬프고 외롭기 때문에 광활한 인터넷 평야에 한 번 외쳐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나름 영잘알인 내가 자레드 해리스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팬들이 캠페인까지 벌여가며 다음 시즌을 살려낸 이제는 아마존 오리지날이 된 <익스팬스> 때부터인데, 정말이지 너무나 죽여버리고 싶은 캐릭터였다.
어느 정도로 싫었냐면 <사랑과 전쟁>에서 허구언날 바람피는 남편으로 나오는 배우를 목격하면 쫓아가서 나무라는 어떤 그런 스타일의 오지랍을 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왓챠 <체르노빌> 출연진에 그를 넣으며 이 아저씨 HBO 드라마도 나오네 하며 혼자 빡이 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뜻이겠는가? 이게 다 연기를 띄엄띄엄 하지 않는 훌륭한 배우라는 뜻이다. 다큐급으로 낯선 배우들이 나오는 <체르노빌>에서 그나마 어디서 봤던거같은 사람으로 등장해 (일부 시청자들에게는) 귀여워지기까지 하는 발레리 레가소프역을 연기한 자레드 해리스는 요 몇 달간 내가 밤낮으로 가장 보고싶어하는 사람이다. 왓챠플레이에서 체르노빌을 n차 재생하며 매일 만나고 있다. 왓챠플레이에 있는 <링컨> <어떤 여자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에서도 그의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하간에 그는 단순히 소련감자로 치환되기에는 아깝기 그지 없는, 아주 대단한 재능과 어마어마한 귀여움과 인간적인 훌륭함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지점을 이해하려면 소상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설명이 필요하면 망한 콘텐츠랬는데.
그는 어떤 인생을 살다 2019년에 소련감자가 되었나.
유명 배우의 아들 ~ 이상 캐릭터 전문 배우가 되기까지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위트있게 이야기를 하는 영국 사람이다.
1961년 런던에서 배우이셨던 어머니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을때 많은 이들이 슬퍼했던 첫 번째 덤블도어 리차드 해리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레드 해리스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하지만 <체르노빌>의 발레리 레가소프를 너무 잘해내어서 이제는 이것도 옛말이 될 것 같다.(내뇌피셜^^)
하여, 인터뷰를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아버지에 관한 질문을 받는데, 때마다 하는 대답들을 보면 아버지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사실, 오리지날 덤블도어 리차드 해리스는 영국에서 헬레이져라 불리는 자유와 방탕의 아이콘이었는데 자레드 해리스에 따르면 아버지가 그런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다고 한다. 기숙학교에서 지내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던 때면 아버지는 자식들과의 시간에 온전히 함께하셨다고. 아버지의 절친 배우 피터 오툴을 아버지의 장례식때서야 처음 만났다고 하니, 어린 자식들에게는 자기가 즐기고 있는 것들을 공유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다. 후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버지의 헬레이져 시절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때마다 너무 좋다고.
그래서 몇 인터뷰어들이 그에게 아버지의 화려한 배우 생활을 보고 배우를 꿈꾸게 되었나? 라는 식으로 물으면 그는 화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함께 이야기를 할 때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아버지 해리스는 해리스 형제들에게 자기가 맡은 배역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연기를 해보이곤 했다고 한다. 그게 일상적인 일이었고, 보고있으면 너무 재밌었다고. 미루어 보자면, 아버지의 유명세로부터는 보호 받았지만 아버지의 재능과 열정은 가까이 느끼면서 건강하게 성장한 느낌이다.
그렇담 보고 자란게 있어서 배우가 되었구나 싶지만, 꼭 그렇지 않다. 나름 고민을 하다가 28살이 되어서야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듀크대에 입학할때만 해도 영국 땅을 떠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따지는 것을 좋아해서(argumentative라고 표현) 변호사나 될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 다닐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여 뭘 해볼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연기에 관심이 생겨 23살에 문학과 드라마 전공으로 듀크를 졸업하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드라마 스쿨 CSSD(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를 27살 즈음에 졸업하고,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에서 연극을 올리며 연기력을 다진, 듀크 이후의 코스만 보면 (내가 별로 안좋아하는) 전형적인 영국 배우이다.
드라마 스쿨을 다닐 적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함께한 친구들에 비해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오디션 떨어진 이야기와 오디션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주 열정적이다.
1989년 친형이 연출한 <레이첼 페이퍼스> 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쪽에 발을 들인다.
IMDB에 있는 그의 한 말(Quotes) 섹션에 보면 이런말이 있다. "평범한 캐릭터에 오디션을 봐왔지만, 한 번도 따낸 적이 없어요" 대신 앤디 워홀, 존 레논, 셜록의 모리아티, 톰 크루즈의 주정뱅이 형 등을 해왔다.
<체르노빌>의 발레리 레가소프 외에도 조지 6세, 앤디 워홀, 존 레논 등 실존인물을 많이 연기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링컨>의 율리시스 S. 그랜트를 가장 다시 해보고싶은 캐릭터로 꼽았다. 종전 이후 끊임없이 재해석 되고 있는 인물이라 흥미롭다고.
<체르노빌>의 발레리 레가소프 이전에는 드라마 <매드맨>의 레인 프라이스로 통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디서 인터뷰를 하면 아버지 이야기와 함께 꼭 언급되는 캐릭터이다.
<매드맨>은 시즌3 에서 1회만 계약을 하며 사람들이 널 마음에 들어하면 계속 할 것이고 아니면 이게 끝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시작했다고 한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의 해롤드 핀치 마이클 에머슨도 드라마 <로스트>에 처음 캐스팅 되었을때 며칠간 지낼 짐을 싸서 하와이에 갔다가 몇 년간 눌러 앉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걸 보면, 연기 잘하는 조연들이 메인 스트림에 들어갈 때 겪는 흔한 일화 인 것 같다. 여하간 우리 자레드도 <매드맨>에서 몇 시즌동안 살아남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아주 인상 깊은 캐릭터로 남게 된 것이었다.
신비한 동물사전이 제작되며 젊은 덤블도어를 누가 하느냐 말이 많았을 적에 일부 팬덤에서는 당연히 아들 해리스가 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주드로가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덤블도어 캐릭터를 놓친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당연히, 자레드는 그들의 선택이 옳을 것이라고 주드가 잘 해낼 것이라고 예의바른 대답을 함.
자레드 해리스 이름 여섯 자 알리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자레드 해리스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은 어떤 작품을 할 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되는, 첫번째 선택(First choice)이 아닌 배우였는데, 그래서인지 이 지점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해온 사람처럼 보인다. + 요즘말로 '안습' 일화가 풍부하다.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개봉 당시 뉴욕 프리미어 행사가 열리자, 뉴욕에서 자신을 처음 연극 무대에 서게 해준 선생을 프리미어에 초대했다. 기자들이 그에게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면 참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마침내 레드카펫에서 이 분이 제가 처음 뉴욕에서 연기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시다 라고 소개했고, 인터뷰어가 "와, 그 때 자레드를 캐스팅을 하셨다니, 그에게서 무언가를 보신게 분명하겠군여" 라고 원하던 질문을 해주었는데, 선생이 "딱히 그렇지 않았어요. 영국 연극을 올려야하는데 영국 엑센트를 쓰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 이라고 대답했다고.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조지 6세 역할을 했는데, 조지 6세는 <킹스 스피치>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인물. 공교롭게도 <더 크라운>과 <킹스 스피치>의 촬영장은 같은 곳이었는데, <킹스 스피치>는 영국 역사극이며 여러모로 잘 된 작품이라 그랬는지 그곳에 아주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자레드는 조지 6세를 잘 연기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매일 세트장으로 가는 길에 엄청나게 커다란 조지 6세 콜린 퍼스를 바라봐야만 했다고.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는 아무래도 신체적으로 인물을 표현해내는 것이 신경쓰이기 마련이라, 자레드 본인이 보기에 자신은 조지 6세와 너무 닮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몇 주간 촬영장을 드나들며 크다란 <킹스 스피치> 콜린 퍼스를 살펴본 결과 콜린도 조지 6세와 닮지 않았다고 판단, "닮지 않은 것은 괜찮군, 왜냐면 콜린 퍼스도 그와 닮지 않았는데 아주 괜찮았으니까!"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시 한번 아버지 해리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인드 파워 건강.
한창 여성 배우들의 출연료가 남성에 비해 적게 책정되고 있다는 이슈로 시끄러울 적에 <더 크라운>에서도 주인공 클레어 포이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맷 스미스보다 적은 출연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자레드는 이 때 제작진을 비난하며 그녀에게 적어도 맷 스미스와 같은 출연료를 책정했어야 하며, 심지어 소급해서 지급해야한다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완벽한 사람같으니라고
그는 숀빈과 비교될 정도로 어디에 나왔다하면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 잘 죽는 것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잘 기억하게 하기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직업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체르노빌>이 이렇게 잘 될 줄 몰랐다고.. HBO가 불러줘서 좋았다고..
<체르노빌>에서 가장 연기하기 힘들었던 씬은 재판씬이라고. 대본이 2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양인데, 과학 지식에 대한 것이고 독백씬이라. +옷을 입지 않은 광부들을 마주하는 씬도 쉽지 않았다고
자레드는 <체르노빌> 발레리 레가소프로 2019년 프라임 타임 에미상 미니시리즈 주연상에 후보로 올랐다. 아직 몇 달 남았지만 <체르노빌>은 2019년 최고작인듯 보이고, 발레리 레가소프만한 캐릭터가 없으니 잘 되실 것 같다. (아멘)
그는 여러 <체르노빌> 인터뷰에서, 보통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에는 대본 이외에도 인물에 대해 혼자 여러가지 공부를 하고 작품에 들어가는데 <체르노빌>의 경우 발레리 레가소프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없었다고. 소련이 아주 잘 그를 역사에서 도려냈더라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작가 크레이그 매진이 조사를 훌륭하게 해 놓았고, 제작진의 큰 그림은 보리스와 발레리가 서로 반대편에서 시작해서 한 편이 되는 것이었기때문에,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잘 해낸 보리스에 맞추어 연기했다고 한다.
<체르노빌>에서는 스웨덴 애버리지 아버지 스카스가드가 옆에 있어서 아담해 보였지만 그의 키는 180cm이 넘고 평소에는 훨씬 슬림하고 쿨한 아웃핏을 자랑한다. 말하시는 것도 되게 멋있어서 평상시 모습으로 인터뷰하는 영상을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 감자가 아니에요 멋있는 사람입니다.(간절)
덕질을 하면 우아함을 유지하기 힘들어져서 슬프지만, 마무리를 해보자면 아무리 콘텐츠가 대단해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치를 떨며 싫어하던 앤더슨 도스인데, 발레리 레가소프가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워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왜 이토록 발레리 레가소프가 된 자레드 해리스를 사랑스러워 하는 것일까. n차 관람을 하며 묵상해보았다.
보통 학자들은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의 소용돌이 바깥에서 문제의 양상을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내가 아는 어떤 교수님은 이 지점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고 하셨다. 같이 울어줄 수 없는 포지션에서 그들이 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짚어내고 틀릴 수도 있는, 그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자레드 해리스의 발레리 레가소프가 이러한 지식인이 지닌 강직함과 가책, 슬픔을 너무나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지만 그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학자. 이 사고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많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고 그것을 저버리지 않기위해 호통치는 거구의 보리스에게 끊임없이 대항하며 그를 자기와 같은 페이지에 서게 한 것. 스스로의 몰락이 빤히 보이는데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선택한 것. 곡학아세가 학문함의 동기인 것 같은 세상인데 말이다.
자레드 해리스가 그 동안 친구들 다 햄릿 캐스팅 되는데 혼자만 안되고 드라마 들어가면 숀빈이랑 배틀 떠도 될만큼 자꾸 죽어 없어지고 하면서 험난한 업계에서 꿋꿋이 목숨을 부지해왔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으로 이렇게 좋은 캐릭터로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내가). 자레드도 행복하겠지. 영원히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까지 듣보 서양 중년 배우 TMI 꾸역꾸역 읽으면서 오셨으면 <체르노빌>에서의 사랑스러운 발레리 레가소프를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아멘)
체르노빌, 지금 보러 갈까요?
Dora / 왓챠
안녕하세요 왓챠 도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