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집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커튼이 바람에 살며시 흔들렸다. 창으로 빛이 들어왔고, 공중에서 먼지가 느릿하게 떠다녔다.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찰나, 뒤에서 밀려든 빛이 엄마의 윤곽을 윤슬처럼 반짝이게 했다. 나는 말없이 숨을 고르고, 오래 보아 온 얼굴을 낯선 듯 바라보았다. 곧 내 입에서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엄마, 예쁘면 뭐가 좋아?”
아침운동을 다녀온 엄마는 신발을 벗다 말고 날 보더니, 미소를 조금 지으며, 비밀을 건네듯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예쁘면, 사람들이 친절해.”
평범한 말이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새롭게 들렸다. 짧은 말이 방 안 구석구석을 맴돌다 햇빛을 타고 내 마음속으로 번져왔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래 기억될 것 같은 묘한 예감이 스쳤다.
기억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교실을 지난다. 엄마가 학교에 오신 날,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새로운 선생님 같다”라고, “예쁘다”라고, “우리 반 선생님이냐”라고. 그때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니—누군가가 장난스레 불렀던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가 개사되어 한 귀퉁이에서 흘렀다. 나는 그저 책상 속 내 공책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 비밀처럼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데스크에 앉아 잠깐 말을 나누었고, 그 사이 햇볕이 교실 안쪽까지 깊게 걸어 들어왔다.
고등학생 때, 한여름 뜨거운 오후였다. 엄마 친구분이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넌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말했고, 이어 내 얼굴을 보며 “근데, 딸은…” 하고 말을 흐렸다. 그 뒤로 이어진 “… 아빠 닮았나 봐”는 방 안의 열기와 섞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 말이 아프다고 느낀 건 한참 뒤였다. 그날의 나는 냉수를 들이켜고,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들였다. 그저 그런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마 전 일이었다. 엄마는 지하철에서 ‘지공’(지하철 공짜)이 된 뒤였다. 유독 피곤해서 앉아 계시던 날, 옆자리 아주머니가 검지로 엄마 팔을 툭툭 찔렀단다. “저분이 더 연세 많아 보이잖아요.” 엄마는 그제야 눈앞의 흰머리 할머니를 보고 일어나 얼떨결에 자리를 내주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담담히 말했다. “예쁘면 사람들이 친절하지만, 가끔은 불친절할 때도 있지.” 끝에 붙은 웃음은 길지 않았다.
그날 아침, 햇빛 아래의 엄마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같은 날 오후에 들을 말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병원의 냄새는 언제나 숨기는 게 없었다. 소독약과 금속과 오래 선 채 남은 사람들의 체온이 섞인 냄새. 대기실의 모니터는 전광판처럼 이름들을 나타났고 사라졌다, 간호사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냉담했다.
“진료 지연 중이에요. 차례 되면 불러드릴게요.”
우리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엄마는 내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약간 춥다고, 따뜻한 물을 마실까 하시며 종이컵을 한 모금 비우셨다. 나는 모니터를 멍하니 보다가, 손바닥을 움켜줬다 펴보았다. 손바닥에 작은 땀방울이 맺히는 느낌이었다.
대기실은 누군가의 심장이 뛰는 속도대로 느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번호표를 손가락으로 접었다 펼쳤다 하고, 누군가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시간이 더디 흐르는 느낌이었다.
문이 열리고 이름이 불렸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들었다. 표정엔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그 무표정이 가장 많은 것을 말해버렸다.
“재발입니다.”
“…”
“완치를 전제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으로 1년 이상 생존 확률은… 절반 정도로 보셔야 해요.”
절반.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세웠을 때 딱 중간인 절반. 그 절반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의사의 입술이 계속 움직였지만, 단어들이 내 귀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의미 이전에 어딘가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병원 문을 나서자, 이른 봄 향기에 세상이 환했다. 햇빛이 길게 스며들었다. 나는 아침의 엄마를 떠올렸다. 예쁘면 사람들이 친절해. 그 말이 여기서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생각하자 서러움이 몰려왔다. 엄마는 가볍게 어깨를 폈다.
“엄마, 최선을 다해서 치료받을게. 걱정하지 마”
엄마의 긍정적인 모습에 순간 마음을 내려놓을 뻔했다. 재발이 뭔지, 완치가 안 된다는 게 뭔지, 우리 모두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동아줄을 붙잡고 있다는 기분만이 남았다.
밤 11시.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렇듯 신호음이 길었다. 부재중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겨우 연결되었다.
“왜?”
그 한 마디가 나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봐야 할 것 같아. 네가 있는 데로 갈게. 늦게까지 여는 카페 찾아서 문자 할게.”
“지금? 나 집인데.”
“응. 금방 갈게.”
택시를 잡자 운전사는 목적지를 묻는 대신, 백미러로 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입력한 장소로 향한다는 듯 끄덕였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우리는 세 개의 터널을 지나갔다. 조명이 속도에 맞춰 스쳐 지나가며, 차창 위에 반점처럼 박혔다 사라졌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처음엔 어떻게 말을 꺼낼까. 충격을 줄여 말해야 할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인데. 생각은 앞서가고, 말은 뒤처졌다.
역 근처 24시간 카페를 찾았다. 디저트처럼 팡팡 튀는 느낌의 공간도 안되고, 위하여, 한잔 더 느낌의 술집도 안 되었다. 이곳은 커피와 와인을 같이 팔았고, 조명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적당히 피곤한 사람들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두 테이블쯤 떨어진 자리, 너무 개방적이지도 구석지지도 않은 자리를 골랐다. 텅 빈 잔 두 개가 눈앞에 놓인 것처럼, 아직 오지 않은 동생의 빈자리가 카페 안의 공기를 약간 묘하게 긴장시켰다.
“어디야?” 하고 문자를 보냈다. ‘이제 나가’라는 답이 조금 늦게 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내 속에서 부글거리던 말을 한번 다 삼켰다. 오늘만은 화내지 말자. 주문대에서 따뜻한 밀크티를 받아 들었다. 컵의 온기가 손바닥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동생이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맨발에 대충신은 슬리퍼였다. 급한 기색은 없었다.
“뭐 마실래?”
“콜드브루. 디카페인.”
나는 그의 잔을 건네고, 잠깐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어려 보였다. 아니, 어려 보이고 말고를 떠나, 내게 닿는 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난기 없는 표정, 피곤이 밑그림처럼 깔린 얼굴이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준석아,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엄마… 앞으로 1년 이상 살 확률이 50%래.
재발이래. 완치는… 없대.”
동생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주 잠깐 멈춘 뒤, 그가 내뱉은 말.
“나 취업은 어떻게 해.”
탁, 하고 내 안 어딘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노와 허탈과 연민이 뒤엉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꿀꺽 내려갔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렇지만, 우리 지금은 엄마 생각을 하는 게...”
채 말하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밀크티를 입으로 가져가 마셨다. 그는 시선을 피하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얼음이 얇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잔인한 봄의 끝자락이었다. 기쁘게 추억을 남기기 위해 갔던 리조트에서 엄마는 갑작스러운 오한과 열이 시작되었고, 끝내 119를 타야 했다. 응급실의 밤은 낮보다 충혈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고 있었다. 모니터는 어디선가 늘 울렸다. 삑—삑—. 그 소리는 사람의 생과 사를 쉽게 배달하는 소리 같았다. 어렵게 온 응급실에서의 대기시간은 길었다. 당장 고열이 있는 엄마가 빨리 치료받고 괜찮아지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엄마는 대기실 의자에 기대어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등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엄마, 괜찮아.” 이번엔 내가 말했다. 말끝이 무너졌다.
그날 응급실에서는 CPR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쪽에서 정말 말 그대로 응급인 환자가 침대에 눕혀서 왔다. 빠르게 지나가는 간이침대 위에서 한 사람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저렇게 갑작스럽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이번의 응급상황이 엄마와의 이별이 될 것만 같아 까마득했다. 또 한 번은 아이였다. 아기 울음이 찢어진 천처럼 들렸다. 누군가는 살아 돌아왔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그 경계선에 있는 회색의 영역. 그곳이 이 장소였다.
동생은 오지 못했다. 카톡에는 ‘스터디 끝나고 갈게’ 같은 문장이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장 앞의 ‘곧’이라는 부사만이 낡아갔다. 나는 외로웠고, 더 정확히 말하면, 혼자로 느껴졌다.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그런데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래도 준석이는 잘할 거야. 믿어야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지 않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다행히 엄마는 퇴원하셨고, 정원이 있는 우리 집에 지내게 되셨다. 가을이 되자,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졌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은 선선했고, 나뭇잎은 아직 물들지 않은 채 조금씩 흔들렸다.
엄마의 머리카락은 항암의 여파로 많이 빠져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은지 꽤 되어, 뿌리 부분은 제법 은빛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그것조차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새로운 색처럼 보였다. 병이 남긴 흔적이었으나, 엄마의 아름다움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그 은빛은 엄마의 얼굴선을 더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엄마는 불현듯 동생 이야기를 꺼내셨다. 일 년 전 준석이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 얘기였다.
“고오급이라고 해서 갔는데, 맛도 없고 양도 작고 돈이 아까웠어. 그 사람 이번에 너랑 본 흑백요리사에 나오더라. 근데 영 내 취향은 아니더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 얘기만 나오면 왜 이렇게 웃으실까. 병든 몸으로도 그 미소를 지으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속으로는 묻고 또 묻고 있었지만,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햇빛이 벤치에 기울며, 엄마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은빛 뿌리와 빛나는 미소가 겹쳐져, 순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도 여린 존재처럼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지켜보다가 마음이 저려왔다.
엄마의 기력은 더 쇠해졌고, 엄마는 동생을 더 자주 찾았다. “준석이는?” 하고 물어보며 시선을 문 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준석이는 스스로 오는 법이 거의 없었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쯤 “이번 주엔 와야 해”라고 연락을 해야만, 마지못해 움직였다.
“알았어, 잠깐 들를게.”
그런 말투였다. 엄마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그냥 불려서 ‘온다’는 의무를 채우는 듯했다. 묻는 횟수만큼 내 입술은 말라갔다.
“조금 뒤에 올 거야.”
“그래, 일 있겠지.”
엄마는 늘 그렇게 덮었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엄마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은 예전보다 가늘고 적었다. 손으로 쓸어 넘길 때마다 얼마 안 남은 빛이 머리칼 끝에서 한 번 더 반짝였다. ‘왜 하필 얘일까’라는 말이 내 목젖에 매달려 흔들렸다. 내 생각은 엄마의 눈빛과 부딪혔다. 엄마의 눈은 확고했다. 나는 저 아이를 믿는다. 그 믿음이 나를 미세하게 삐걱이게 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잠깐 정신이 맑아진 틈에 나를 불렀다.
“딸아.”
“응.”
“그 아이, 네 동생… 네가 옆에서 좀 더 지켜봐 줘. 나는 믿을게.”
유언이 꼭 임종직전에 하는 게 아니란 걸 직감했다. 그 말은 엄마가 죽음과 싸우며 남긴 말이었고, 축복이었고, 명령이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이해하기 싫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응.”
엄마의 기력은 나뭇잎이 떨어져 버린 것만큼 쇠했지만, 마지막 항암을 하기 위해 입원했다. 항암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계속 미뤄졌다. 입원기간만 기약 없이 길어질 뿐이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엄마가 준석과 함께 있겠다고 온몸으로 표현해서, 엄마와 동생 둘이 병원에 함께 있었다. 병원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보호자 1명만 있을 수 있었다. 집에 막 도착해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임종 직전이래, 누나. 빨리 와야 할 것 같아” 동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내 심장은 툭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엄마에게 가는 길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중력보다 10배는 강한 힘으로 엄마에게 가고 있었다.
의사를 볼 수도 없었다. 간호사들만 바삐 움직였다. 생명이 위독해, 일반병실에서 격리된 어떤 병실로 엄마는 옮겨지고, 숨을 쉬기도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내게는 이렇게 쉬운 호흡인데, 엄마한테는 그렇게 힘겨운 걸까? 나의 생명을 떼어서 엄마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정이 넘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 어쩌면 죽음과 맞닿은 순간의 찌릿한 느낌이 닿았다. 손끝의 차가움은 차갑다기보다 ‘비어 있다’에 가까웠다. 체온이 빠져나간 자리를 공기가 차지하는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심전도 모니터 화면을 자꾸 체크하게 되었다. 모든 수치가 0으로 수렴하는 듯 보였다. 엄마의 속눈썹이,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것처럼 얇아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사건이 바로 그게 일어났다. 엄마의 가슴이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순간인지, 한 세기인지 알 수 없는 길이의 정적.
당직 의사가 와서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사망 선고 하겠습니다. 25년 2월 18일 새벽 3시 26분.” 그의 말은 무심했고, 정확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울었다. 나도 울었지만, 더 크게 울었던 사람은 동생이었다. 마침내 그는 병실 오른편에 서서 무너졌다. 세상이 떠나갈 듯 꺼이꺼이 울었다. 숨을 몰아 쉬다가 더 크게, 다시 더 크게 울었다. 나는 놀랐다. 그 울음이 너무 진짜라서, 내 안에 쌓아두었던 얇은 판단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 아이도 사랑했구나. 이 아이 나름의 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아주 단순한 사실이, 가슴뼈를 밖에서 안으로 누르는 것처럼 아프게 들어왔다. 그날 우리를 둘러싼 슬픔이 너무 커서 다른 병실이 상대적으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우리의 울음소리를 다 듣고 엄마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모두 숨죽여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아빠는 영정사진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용기가 없었다. 항암을 시작하기 전, 엄마가 반짝반짝 빛나는 때, 엄마는 마지막 사진을 찍자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진 하나 찍어 둘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영정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과 웃으며 마지막 사진을 남기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고개를 저었다.
봄 햇살 엄마가 말했던 사진을 찍지 않은 죄로 난 서랍을 뒤져야 했다. 엄마의 마지막을 떠나보내는 사진을 찾으며, 손끝이 자꾸 떨렸다. 그중 여권사진이 있었다. 병색이 없고, 눈이 초롱한 때의 얼굴. 우리는 그 사진을 골랐다.
“여권사진이네.”
누군가 말했다.
“하늘나라로 여행 가시니까요.”
내가 말했다. 말끝이 떨렸다. 그건 위안이었고, 합리화였고, 작은 기도였다.
엄마는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더 예쁜 사진이 많았을 텐데, “참 아쉽다.”라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 엄마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예쁘고 항상 웃는 얼굴로 남아있구나.
그리고 이어진 입관식.
엄마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누워 계셨다. 그 옷은 아빠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가시는 길 엄마처럼 화려하고, 예쁘고, 곱게.’ 아빠의 말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를 아름답게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항암으로 머리카락은 많이 빠져 있었지만, 눈을 감은 얼굴은 마치 깊은 잠에 든 듯 고요했다. 뿌리 부분이 은빛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조차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분홍빛은 창백한 얼굴빛을 덮어주듯 은근히 피어올라, 오히려 엄마의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엄마가 다시 예쁘다고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보다 더 단아하고 더 고요하게. 고통과 병의 흔적이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단정한 아름다움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육신이었지만, 그 모습은 마지막까지 엄마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 곁에 서 있는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는데, 엄마의 얼굴은 눈물과 동떨어진 듯 평온했다. 마치 이별을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 긴 여행길에 오르기 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장례식장에는 흰 조화가 가득했다. 꽃잎은 밤새 시들 줄 모르고 서 있었고, 은은한 향 냄새는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공기 속에 가라앉은 연기는 매캐하기보다 묵직했다. 그것은 향의 냄새라기보다, 기도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동생의 친구들이 꽤나 많이 찾아왔다. 아직 사회 초년생인 아이들이라 검은 양복도 어딘가 헐렁하고 구두는 어색했지만, 그들의 태도만큼은 진지했다. 장남은 동생이었고, 그 옆에서 친구들이 조용히 어깨를 나란히 붙였다. 누군가는 종이컵에 물을 받아다 주었고, 누군가는 국화를 봉투째 뜯어 물병에 나눠 꽂았다. 향로 앞에 선 아이들은 서툴러 서로를 살짝 끌어당겨 자리를 바꾸며 분향의 절차를 익혔다. 고개 숙이는 순서 하나에도 아직 어설픔이 묻어 있었지만, 그 어설픔마저 진심 같았다.
“준석아, 내가 밤새울게.”
친구 한 명이 낮게 말했고, 다른 한 명은 말없이 외투를 벗어 동생 어깨에 걸쳤다. 동생은 대답 대신 향로 앞에 앉았다. 향이 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던 그의 손등 위로 재가 조금씩 흩어져 떨어졌다. 그는 그 재를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마치 엄마의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음속에서 깨달았다. 향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말하길, 장례 중 향은 절대 꺼지면 안 된다고 했다. 망자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자, 산 자의 기도를 실어 나르는 다리라고. 꺼지는 순간 정성이 끊기고, 혼이 머무를 자리를 잃는다고도 했다. 그 말이 미신 같다고 여겼던 적도 있었지만, 그날 밤 나는 알았다. 향은 엄마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남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엄마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졸음이 몰려올 때마다 동생은 찬물을 들이켰다. 향이 꺼지지 않았는지 수십 번도 더 확인했다. 향로에 몸을 숙일 때마다 손끝에 재가 묻어났다. 나는 그 재를 털어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무심한 손등 위의 재가 오히려 그의 정성과 죄책감, 그리고 마지막까지 엄마를 잡고 싶다는 마음의 증표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새벽에 돌아가신 덕에, 우리는 3일 장을 온전히 치를 수 있었다. 잠깐 들렀다 가는 손님도 있었지만, 동생의 친구들 중 몇은 3일 내내 남아 향불을 함께 지켰다. 낮에는 문상객 사이에 섞여 분주히 움직였고, 밤에는 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졸다가도 향로 앞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은 피곤했지만 묵직한 연대감이 있었다.
장지로 향하는 날, 친구들이 관을 들어 올렸다. 아직은 앳되고 젊은 어깨들이었지만, 그 어깨 위에서 엄마의 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장터에 도착하자 관은 곧 유골함으로 바뀌었다. 동생은 두 손으로 그 유골함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자기로 된 유골함 표면에 눈물이 떨어져 맺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리고 때론 가까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의 동생은 내가 알던 동생보다 분명 조금 더 커 보였다.
비로소 엄마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온몸으로 엄마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엄마, 당신이 믿었던 아이가 여기 있어요. 당신의 믿음이, 이제 내 순서로 넘어오고 있어요.‘
집으로 돌아온 뒤, 거실은 한 낮처럼 밝았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아침의 창에 걸리던 햇빛이 아닌데도, 어쩐지 방 안에는 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공기 중의 어른거리는 빛을 잡아보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예쁜 얼굴도, 건강한 몸도, 길게 이어진 일상도 결국엔 흩어진다. 그러나 남는 게 있었다. 믿음. 엄마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하나의 뜻. 엄마는 뜻을 되새기며, 내 손에 쥐여주었다.
“동생을 믿어줘야 한다.”
명령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부탁이었다. 사랑이 부탁의 형식을 빌릴 때가 있다. 나는 그 부탁을 받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얇은 각서에 사인하듯 ‘응’을 썼다.
나는 전화를 들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그가 받았다.
“왜?”
이번엔 내가 먼저 웃었다.
“그냥. 네가 뭐 먹었나 해서.”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얇은 하얀색 커튼이 가볍게 살랑였다. 나는 문득, 아침의 엄마를 떠올렸다. 햇빛에 젖은 얼굴. 예쁘던, 너무나 예쁜 엄마.
“예쁘면 사람들이 친절해.”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예쁜 외형에서 친절이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끝은 마음이 정한다는 것을. 사실은 엄마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더 친절했다는 걸. 나는 엄마의 마지막 분홍 저고리와 하얀 얼굴을 떠올리며 엄마의 하늘나라로의 여행을 조용히 축복했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빈자리를, 동생과 함께 천천히 메워가기로 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
-끝-
*자전적 단편소설입니다.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픽션이 섞여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쓰고 나니 더 뚜렷이 엄마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