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없었죠 정규직이 돼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엄마를 은퇴시켰다는 게
그렇다. 나는 마흔이 넘어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정규직으로 근무한 적이 없었다.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1년 이상 근무한 이력이 없다. 당연히 로또가 되지도 않았다. 글짓는 일을 했다니 엄청난 성공작이 있어서 저작권료를 받아 살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 많은 남자친구를 만나 미래를 약속했나, 그럴 수도 없었다. 글 쓰게 생겼죠? 집에 오래 있을 것 같죠? 라는 농담으로 배수의 진을 쳐야 하는 외모에 4년짜리 대학은 6년만에 졸업했고, 3년짜리 대학원은 5년만에 졸업한 후 조교로 1년이나 더 학교에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나의 소원은 월 100만원을 버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더도 덜도 아닌 딱 월 100만원만 버는 일이 꾸준히 있었던 것이 밥벌이의 행적이라면 행적일까. 다행히 그 돈으로 대학과 대학원 학비를 감당했으니, 그건 참 우주적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주제에 6년 전 36살 무렵, 운 좋게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이유로 (그러나 2년짜리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1년, 12달로 나누면 허세를 부려선 안 되는 돈이었음에도) 내 생애 최고의 사치를 부리고야 말았다. 자주 갔던 엉터리 삼겹살 집에서 호기롭게 소한마리 모듬을 시키고 차가운 소주 한 잔을 들어 프로젝트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는 순간, 그 때 뱉은 말로 인해 내가 6년 동안 얼마나 고독해 질지 예상하지 못한 채, 달고 쓴 소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털어넣으며 기어코 그 말을,
"엄마, 이제 일하지 마"
내뱉고야 말았던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절실하게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일 하지 않는 엄마를.
엄마는 내가 36살이 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평창동 가사 도우미부터 교회의 회계 사무일, 포장 부업, 요구르트 노점을 전전했고 내가 스무살 때는 이모 둘과 함께 명동에 칼국숫집을 개업했다. 우리집은 자본금을 댈 여력이 없었으므로 나의 엄마는 가장 먼저 출근해 식당을 오픈하는 일을 맡았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인천 백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후 명동역에 내려 칼국수 집 문을 열었고 아침 백반 식사를 팔기 위해 북엇국을 끓이고, 밑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 장사가 끝난 네시쯤 퇴근했으니 장장 10시간의 중노동. 공교롭게도 그때 엄마 나이는 마흔 초반, 지금의 내 나이와 같았다.
엄마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빌라 계단을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걸어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도 없었음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새벽같이 일어나 해장국을 끓어놓고 묵묵히 서울로 출근했다. 식당은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 수입은 나쁘지 않았는데 점점 높아지는 월세와 축나버린 몸 때문에 이모들은 가게 폐업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후 엄마는 인천에서 작은 식당을 열고 백반 장사를 했지만 명동 칼국숫집 만큼의 벌이는 당연히 못되어 고민이 깊었다. 그때 "언니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텔레마케팅 보험일을 소개한 아는 동생의 권유로 엄마는 마흔 중반에 처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텔레마케터가 된 후 그렇게 15년을 일했던 것이다.
수많은 일을 넘나드는 동안 돈이라도 잘 벌었으면 좋았으련만 "이 돈 받고 전화 그만 할 거예요, 아니면 이것도 못 받고 나 그대로 나자빠지는 꼴 볼 거예요"라며 아빠의 도박빚을 채근하는 사채업자와 호기롭게 딜을 하고, 그럼에도 신용 불량자가 되었으며, 다시 또 빚을 갚기 위해 뼈를 갈아 일해야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자식(나)의 이름으로 제3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도박을 감행한 남편이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 신실한 표정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집에 돌아오며 온갖 욕지거리와 함께 교인들의 험담을 하는 꼴을 견뎌야 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었다.
그 풍파의 소용돌이에서 방문을 닫고 이어폰을 낀 채 김동률의 음악을 들으며, 체홉의 <벚꽃동산>을 읽고 <데미안>을 필사하며 소심과 불안에 안절부절했던 나는, 절실히 갖고 싶었다.
일하지 않는 엄마를.
웃는 모습의 엄마를.
이상한 일이다. 그 후 아빠와 이혼을 하고, 서울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왔다가 다시 경기도 지방으로,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하는 동안 엄마는 여전히 쉬지 않고 일했으며 예전보다는 자주 웃었지만, 생계의 불안은 우리를 계속해서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나가서 돈 벌어와!" 라던지, "글은 무슨 글이야, 취직 안 해?" 따위의 말을 한 적이 없다. 공공의 적이었던 아빠가 사라진 후, 예술병에 걸려 대학원에 진학해버린 내가 미묘하게 아빠의 롤을 맡고 있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엄마는 그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만들어 놓고 출근하는 삶을 반복할 뿐이었다.
여튼 그 말을 내뱉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나의 전략은 이랬다. 내가 "일하지 마, 내가 엄마를 책임질게" 라고 말하면, 엄마는 그런 딸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띄고 "별 소리 다 해. 너는 너 벌어서 살아야지"라고 답하고, 그럼 그 말을 받아 또 당연한 듯 "아냐, 나 진짜 할 수 있어. 엄마도 이제 쉬어야지"라고 주고 받는 동안 우리의 눈가는 촉촉하고 뜨겁게 차오른 채 그렇게 뭉클한 저녁 자리를 마치는 것. 그게 다였다. 다음 날 이모들에게 "아니 걔가 그런 말을 다하더라고"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우연찮게 들으며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보자 다짐하는 내가 있다면 더 좋고. 당연히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엄마가 회사에 출근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쓸쓸한 추억의 한 장면. 아마 당시 내 본심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진짜? 그래도 돼? 그럼 엄마 그만 둔다고 말하게"
"...어?"
이게 아닌데. 아니, 이럴 수도 있지만 굳이 벌써 이러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나는 허세를 부릴 때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서 당연히 큰 소리를 외치며 소주잔을 들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 순간 어떻게 "아니 그냥 해본 말이었어" 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하지, 내가 엄마 은퇴 시킨다니까! 매달 000만원 줄 수 있어!"
세상에 여러 푸어(poor)가 있다고 한다. 하우스 푸어, 카푸어, 타임 푸어... 혹시 마마 푸어도 있나? 갑자기 밀려드는 이게 아닌데, 그게 아니고의 벼락같은 현타.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나는 계산을 하고 나와 하늘을 본다. 새까만 밤 하늘에 구멍뚫린 듯 박혀있는 달님은 "내가 뭐!"라는 식으로 멀뚱거리며 빛나고 있을 뿐. 일단은 프로젝트 계약금이 들어올 예정이니 몇 달은 버틸 수 있겠지. 아, 그 다음엔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된 이상, 물가상승률도 있고 여튼간에 월 100만원까지는 고마웠고 이제 그럼 월 000만원만 벌게 해주세요. 달님, 별님, 하나님, 부처님, 세상의 모든 님들아.
그렇게 엄마는 엉터리 삼겹살집에서의 엉터리 허세 선언을 명목으로 장장 40여년 간의 긴 노동 현장에서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엄마 나이 만으로 62세, 한국 나이로 64세. 정년이 지났을 나이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엔 아쉬운, 나이 60대 중반. 그리고 나는 30대 중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