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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불 Sep 14. 2024

자식 하나 잘 키웠네라는 말의 독(毒)

사람이 어떻게 트로피가 되

그리고 결국 나는 입금 버튼을 눌렀다. 프로젝트에 투입된 지 얼마간 지났을 때, 시일로 따지자면 선금이 아니라 1차 중도금 쯤 되는 돈을 받아, 이 정도 금액이면 몇 달은 더 허세를 부릴 수 있으리라는 계산 하에, 엉터리 생고기집에서의 부양 선언을 증명하기 위해, 첫 번째 생활비를 송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는 정말 회사를 그만 둠으로써 나에게 '뱉은 말'의 책임을 선물처럼 선사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 너 어디 얼마나 할지 두고보자 라는 식으로 홧김에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영업을 해오며 쌓아온 고객들이 있었던 덕에 가끔 전화를 걸어 와 친지나 지인을 소개해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설계사 코드가 사라지지 않으면 간헐적으로 사무실에 출근해 실적을 올릴 수 있으니, 마냥 손을 털어버린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술이 깬 나는 나대로 당장 들어온 돈도 있었고, 프로젝트 전체 계약금과 다른 일들을 보태면, 어떻게 해볼만 하지 않을까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엄마의 통화를 중단시키지는 못한 채 뜨거운 해장 국물을 들이켰다.




한창 유튜브 채널에 카푸어 에피소드가 알고리즘을 탔던 때가 있었다. 벌이에 맞지 않는 차량을 산 사람들이 등장해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타보고 싶었다는 차를 자랑하는 컨텐츠였다. 그 영상 아래는 이런 댓글이 꼭 달렸다. "오늘만 사는 놈"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오늘만 살기 위해 매월 할부금을 갚았다면 매달 엄마에게 생활비를 입금하기로 한 나는 "어제만 사는 년"이 아니었을까 하고. 




어린 시절, 다 무너져가는 엄마의 자존감이라는 우산을 받치고 있었던 것은 한 살 터울의 자매였던 언니와 나였다. 백수에 도박, 알콜 중독자인 주제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빠는 사시사철 쏟아지는 징그러운 폭풍처럼 엄마의 우산을 뒤집어 놓았고 친정은 의지할 처마가 되어주지 못했다. 잠시라도 숨을 고를라치면 월세일과 엄마가 쓰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는 일수 수첩이 송곳처럼 꽂혔다. 지인들은 다양한 레퍼토리로 엄마의 불행을 위로했지만 마무리는 항상 같았다. 그래도 애들이 있으니 버텨야 한다고. 자는 척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생각했다. 


엄마가 버티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언니와 나는 '엄마가 버텨볼 만한 명분'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엄마의 생일에는 용돈을 모아 시장에 있는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사서 한 켤레씩 포장해 선물했고, 설익은 재능으로 우량주가 될 재목임을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니가 동네 피아노 학원 콩쿨 상장을, 내가 글짓기 상장을 건넬 때마다 돌처럼 굳어있던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언니는 교회에서 제일 잘 사는 권사님의 딸보다 피아노를 잘쳤고, 대기업에 다니는 집사님의 아들보다 노래를 잘했다. 어린 시절 활자 중독이었던 나는 어디선가 본 '새출발'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있다가, 교회에서 주최한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만나 새출발했다'는 거짓말과 상장을 맞바꿔 왔다. 


엄마가 반지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삼익 피아노로 큰 딸이 연주하는 '소녀의 기도'를 들으며 가만히 티비의 볼륨을 낮출 때,

항상 지인들에 위로만 받다가 '그래도 내가 쟤들 때문에 버틴다' 고 답할 때,

커서 꼭 호강시켜 줄게. 라는 빈말에 미소를 지을 때, 


니와 나는 당분간 우리가 죽지 않을 거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당시 교회에는 계절마다 '가족 찬양대회'라는 것을 열었는데, 왕년에 가수가 되고 싶었다며 다 쓰러져가는 장농 위에 올려두던 아코디언으로 이따금 가수 현인의 노래를 불러제끼던 아빠는 온 가족이 반드시 그 찬양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음감 좋은 언니는 테너를 맡고, 아빠는 베이스, 나는 알토를 부르고 엄마는 메인 파트인 소프라노를 맡았다. 아빠는 이제 막 초등학교 1,2학년인 딸들과 아내를 데리고 4성부 합창을 과시하며 재능있는 자식을 트로피처럼 전시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인기상이나 특별상 따위를 받았을 뿐, 언제나 1등 상은 '오랜 투병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과 출전한 집사님네'라던지, '고령의 노모를 모시며 새벽 기도 봉사를 하는 권사님네'처럼 스토리가 있는 가정에게 돌아갔다. 물론, 아빠는 돌아오는 길에 '인간에겐 모두 원죄가 있어 누가 누구를 심판해선 안 된다'며 자신의 과오를 책망하지 말라면서도 '목사에게 개같이 알랑방구를 뀌더니 1등상 받은 거지'라며 남들을 욕하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믿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첫째 딸은 성악과에 진학해 소프라노가 되고,

둘째 딸은 베스트셀러나 드라마 작가가 될 것을. 


그러나 당연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니는 쓰나미같은 사춘기를 정통으로 맞은 뒤, 어쩌면 아빠가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삼익 피아노를 중고 판매상에게 넘기는 희대의 충격을 남긴 채 우리를 떠났고 나는 후로 오래 학교로 도피한 채 예술병에 걸려 있었으니까. 




아빠와 언니가 떠나고 엄마 곁에 홀로 남은 나는 오래도록  '어제'에 살았다. 십수년이 흘렀지만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불안과 공포는 희석되지 않고 나를 자라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자식하나 잘 키웠다는, 모든 게 다 무너진 폐허같은 엄마의 인생에 하나 남은 그 말을 언젠가는 꼭 증명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어제'의 무의식이 나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다짐했던 그 말, 우리가 커서 꼭 호강시켜줄게, 라는 말을 기어코 실현해보고 싶었다. 대단한 호강은 아니지만, 적어도 은퇴로 엄마의 노년을 지지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엉터리 생고깃집에서의 허세는, 섣부른 충동이 아니라 오랜 무의식의 발현이자 결심이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 정규직으로 일해보지 않아서 약간은 부족한 현실감이 남아있기에 감행할 수 있었던 일. 그래서 입금 버튼을 누르는 일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자식 하나 잘 키웠네'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트로피가 되길 자처했던 내가 빛나는 크리스탈이 아닌 소금기둥이 되어 녹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호기와 허세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던 '부양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엄마를 아빠만큼 증오하게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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