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음악에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 천둥소리까지 가세해 웅장한 오케스트라 협업이 여름 아침을 연주한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이따금 번쩍이는 번갯불마저 라이브실황을 더욱더 실감 나게 하는 연출효과, 바야흐로 한여름이 무르익고 있다.
오직 손에 쥔 부채로 연신 바람을 부치며 더위를 쫓던 옛사람들의 여름을 떠올려본다. 김치 항아리는 그늘 깊은 우물가 시원한 물동이에 담가두고 방부효과 있는 연잎에 밥을 쪄서 앞마당 감나무 가지에 소쿠리를 걸어두지 않았을까. 서늘하고 까슬까슬한 촉감 삼베옷을 입고서 끈적이는 땀을 식혔을 것이다. 말복 더위 고비를 바짝 넘어갈 때는 심심산골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읊거나 가락을 노래했을 그네들.
선풍기 에어컨으로 찬바람을 불러들이는 요즘 여름은 덥다 덥다 해도 집집마다 있는 석빙고(石氷庫) 문을 열기만 하면 얼음조각을 꺼내 겨울을 맛볼 수 있다. 하필 우리 집 석빙고가 일주일 전 고장 나서 애를 먹었다. "띠링띠링" 소리가 나더니 냉동실 식재료들이 녹아서 허물거리기 시작했다. 최근 구입한 식재료들은 꺼내서 김치냉장고로 대피시켰다. 그다음 날 냉장실도 뜨뜻미지근해지더니 온장고가 돼버렸다. as접수를 요청했더니 일주일 걸린다고 한다. 다행인 건 작은 붙박이 냉장고가 있어서 신선식품들을 이동시켰다.
이참에 자주 손길이 가닿지 않던 냉동실 깊숙이 박힌 검은 비닐봉지들을 석탄을 캐듯 캐보았다. 다라이 그득 내용물을 쏟아내는 냉동실은 어물전 한 칸, 쌀가게 한 칸이 통째 들어있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곡차곡 입고된 물건들은 유통기한을 지나있었다. 명절 때마다 엄마가 챙겨 준 말린 생선, 쥐눈이콩, 팥, 찹쌀, 콩가루, 고춧가루가 봉지봉지 방앗간을 차려도 될 정도이다. 곡물은 한 며칠 실온에 두어도 상관없지만 생선은 그대로 폐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냉동만 줄기차게 믿고 유통기한을 확인 안 한 채 동굴 속에서 썩어버린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새로 사서 겉에서 계속 밀어 넣기 하였다. 입구에 있는 것만 꺼내 먹고 깊은 데 있는 것들은 뭐가 있는 지도 몰랐다. 이 더위에 고장 난 건 유감이지만 깨끗하게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비워내고 덜어내고 닦아내자 냉장고가 새것같이 텅 비었다. 진작 이렇게 넓고 쾌적하게 쓸걸. 냉기가 순환 안 되게 꽉꽉 채워서 고장이 난 건 아닐까.
요즘 가전회사들은 무상보증기간 10년이 지나면 고장 나는 게 당연한 것처럼 기정사실화 부품이 없다면서 수리불가하다고 말한다. 불쾌지수를 유발하는 소음은 계속 나고(이 소음은 지난해 여름 수리불가 판정받음), 더위 먹어 퍼질러진 냉장고를 수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 기다렸는데 수리불가 통보 새로 구입 배송받는 데 또 며칠, 11년 사용한 허우대 멀쩡한 스틸 냉장고를 아깝지만 내보내기로 하였다.
강산이 변하는 십 년 사용한 냉장고도 이러할진대 반백 년 사용한 '나'는 어떠한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꽉꽉 쟁여둔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과연 온전한지 되묻는다. 아름다운 기억은 추억이 되어 신선하게 보관되지만 상처 입은 기억들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누르고 또 눌렀다. 바깥으로 나오는 미로도 없이 온통 얽히고설켜 어두운 동굴 속에서 주머니에 넣어둔 송곳처럼 나를 향해 아프게 찔렀다.
그간 숱한 바다를 조망하였고 호수를 바라보면서 내면에 간직한 상처 입은 쓰레기를 버리고 또 버렸다. 쓸쓸하게 웅크린 내면의 아이를 보듬어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기를 서서히 쬐게 되면서 추운 점퍼를 벗은 아이는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에게 위로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많이 치유되고 헐거워졌음에도 중압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상처는 타인이 겨누는 말 한마디에 불화살이 되어 되돌아온다. 반성은 하되 신랄한 자아비판은 열등감만 부추긴다. 뉘우치고 살펴서 옮음은 취하고 그릇됨은 내보내면 된다.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못난 그릇됨을 비워서 헌 그릇을 새것처럼 닦으면 녹난 그릇도 빛이 난다.
분홍색 노을이 물든 새 냉장고를 들이면서 이제부턴 여유롭게 사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수납박스에 날짜별 라벨링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한눈에 보이게 보관할 것이다. 가전회사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 냉장고 겉면에 식품보관 리스트를 입력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를 만들면 대박 나겠다.
빠듯한 살림살이 초라하지 않은 친구의 애완묘 몽실이를 생각하며 그녀의 여름 나기를 응원하고, 가냘픈 외가닥 가지가 부러진 채 배송되어 온 고려담쟁이가 창가 가마솥 열기를 이겨내고 부러진 가지에서 새로이 내민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보면서 여름이 키우는 성장을 믿는다. 다육식물 에베레스트는 지난달 집으로 데려왔는데 아열대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시퍼런 빙하가 녹듯 시름시름 앓고 있다. 에어컨 바람을 쐬주고 있는데 안쓰럽다. 찢기고 부러져도 성장통을 앓으며 올바르게 일어서는 자립을 믿는다. 모두 잘 살아가고 있다. 이 무더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