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극지로 분류되는 툰드라 지역이 있다.
난방 가동을 안 하는 겨울에는 더 침침하고 차가운 기운이 엄습한다.
빛은 잘 들어오는 편이나 커튼으로 가리기 일쑤였고 구석 자리에 놓인 쌀포대에 쌀을 푸러 가거나 휴지를 꺼내오는 경우 외에는 발들일 일이 거의 없는 방은 서재임에도 불구하고 창고방과 다름없다.
한쪽 벽면에는 청소기가 늘 비스듬히 서 있고 아이들이 어릴 때 다채로운 멜로디를 연주하던 피아노는 무거운 뚜껑이 닫힌 채 무기력하다. 중고사이트에 여러 번 팔아야지 맘먹다가도 덩치 큰 물건 처분하는 일이 귀찮아서, 어쩌다 한 번은 치고 싶을 텐데 팔아치우고 나면 아쉬워할 것 같아서 자리차지하고 있다.
제일 난감한 물건은 좌탁이다. 가로 1.3m, 세로 0.7m 한 덩치 하는 이 물건은 창가에 놓여있어 언제나 맘 편히 창가로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커튼 여닫을 때도 팔을 쭉 뻗어서 좌탁 눈치를 봐야만 했다. 서재방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도 쓰임새는 거의 없는 이 애물단지를 왜 그동안 방치했는지에 대한 대답은 "에라, 모르겠다."
너른 탁상 위에 온갖 잡동사니를 올려두었다.
먼지 쌓인 책더미, 돼지 저금통, 사진액자, 도자기화병을 올려두고도 넉넉하게 여분이 남아돌았다. 우리 가족의 첫 시작과 거의 함께 한 이 좌탁의 처음 쓰임새는 식탁으로 사용되었다. 대못 하나 박지 않고도 육중한 네 개의 다리가 대들보처럼 짜 맞춰진 두꺼운 소나무 원목 상 위에서 아이들은 올라가서 춤을 추었고 이유식과 밥풀이 와르르 쏟아졌으며 와인 몇 방울이 흘러서 붉게 물든 자국 그리고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며 촛불 환히 빛나는 생일 케이크를 몇 년 동안 떠받쳐주었으며 작은딸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점토 만들기에 한창 재미 들려 조각도에 푹푹 파인 자국이 남아있는 이 튼튼한 좌탁은 추억이 배이고 추억이 가득 쌓인 물건이라서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여태 그래왔듯 며칠 전 아침 창문을 턱 하니 가로막은 좌탁 옆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열고 창을 열자 얌전하던 커튼 자락이 맑은 바람에 펄럭이며 팔월 하순 햇볕이 강물 위에 반짝거리는 윤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집주인은 뒤로 물러나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엇박자를 내는 불협화음이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원래는 밝은 분위기의 서재방을 극지대 차가운 평원으로 만든 장본인 다크브라운 좌탁을 이제는 처분해야겠다는 다짐 아닌 오기가 불쑥 생겼다.
그새 무슨 뿌리를 내렸는가 꿈쩍 않는 옹고집쟁이를 들어내고 허접한 물건들을 치우자 미처 그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 새로이 생겨났다. 아무 가로막힘 없이 곧장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의연하게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편 나무는 일직선으로 곧게 자라서 솔잎들이 보기 좋게 무성한 반면 왼편 나무는 생육환경이 어려웠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무줄기도 비스듬히 휘었고 잔가지들은 풍파에 시달려서 비틀리고 솔잎이 듬성듬성 자랐다. 철사를 휘감아서 억압이 가해진 분재를 보는 모습인데 미적으로 더 아름다워 보였다.
소나무 아래에는 구상나무가 여러 그루 소나무 키를 앞지를 듯 자라나고 철 지난 황매화들이 노란 꽃들을 밤하늘 폭죽 터트리듯 활짝 피우고 있었다. 칙칙하던 하늘은 새파랗게 열리어 가을이 다가옴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 그림 같은 풍경을 간직한 서재방의 진면목을 이제야 알게 된 집주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고 뉘우쳤다. 창틀에 낀 먼지를 말끔히 닦아내고 창가에 어울리는 티테이블과 라탄의자를 두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멍 때리는 여유를 서재방에서 갖게 된 집주인은 집이 넓어졌다며 아주 좋아했다.
혹 지금껏 쌓아둔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곰곰이 헤아려본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한 편견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었다. 그 사람은 벌써 나쁜 습관을 고쳐 새사람이 되어 있는데 이전의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건 과거에 사로잡힌 나의 불찰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만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다 보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왜곡하게 된다. 밝은 창을 곁에 두고도 가로막힌 좌탁으로 인해 그 풍경을 놓치고 살았듯이 성큼 다가오는 가을에는 내 눈에 넣은 들보를 걷어내련다. 비틀린 손아귀에 푸른빛을 거머쥔 집 앞 소나무같이 외부환경 탓하지 않으면서 늠름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