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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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불이

D+576.


19개월째다. 1년 7개월. 576일. 13,824시간. 829,440분.


숫자를 세는 것도 지겹다. 하지만 세지 않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우주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 90분마다 해가 뜨고 진다. 하루에 16번의 일출과 일몰. 그것을 576번 반복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정거장 내부를 바라봤다. 좁다. 통조림 캔 같다. 처음 왔을 때는 경이로웠다. 인류의 과학이 만든 우주 속 집. 하지만 19개월이 지나니 감옥이 됐다.


"오늘 할 일."


나는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안 그러면 며칠씩 말을 안 하게 된다. 인간의 성대는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우주비행사 매뉴얼에 나와 있다.


"시스템 점검. 혈압 측정. 근육 운동 2시간. 식사. 지구 관측 데이터 기록. 통신 보고."


같은 루틴이다. 매일. 576일째 같은 루틴.


나는 조종석으로 향했다. 무중력 상태에서 몸을 밀어 이동했다. 처음에는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물고기처럼 자유롭다. 아이러니하다. 우주에서 자유로워졌는데, 마음은 갇혀 있다.


* * *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다. 1961년. 108분간 우주를 비행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처음으로 우주에 간 여성이다. 1963년. 3일간 체류했다.


발레리 폴리야코프. 러시아 우주비행사. 437일간 미르 우주정거장에 체류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단일 우주 체류 기록.


그리고 나, 권성준. 대한민국 우주비행사. 576일째 국제우주정거장 체류 중. 발레리 폴리야코프의 기록을 139일 전에 깼다.


한국 우주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아시아 최장 기록. 세계 신기록. 자랑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만 남았다.


* * *


20개월 전, 서울우주센터에서 계획이 발표됐다.


"장기 우주 체류 실험. 우주비행사 한 명이 24개월간 단독으로 국제우주정거장에 머물며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합니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김박사가 설명했다.


"왜 24개월입니까?" 누군가 물었다.


"화성 왕복 임무 시뮬레이션입니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7개월, 화성 체류 10개월, 귀환 7개월. 총 24개월. 우리는 화성 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김박사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권대장, 괜찮겠어요?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죠."


거짓말이었다. 진짜 이유는 달랐다. 나는 우주 개척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한국인 최초가 되고 싶었다. 세계 기록을 깨고 싶었다.


야심이었다. 자만이었다.


아내, 지영이 반대했다. "24개월이야. 2년이라고. 민우의 고등학교 생활을 못 보는 거야."


"미안해. 하지만 이건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야."


"무슨 기회? 가족과 멀어지는 기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결국 허락했다. 항상 그랬다. 내 결정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침실 문 너머로 지영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가 하고 싶은 거면 해."


15살 아들의 담담한 반응이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했다.


* * *


D+120.


4개월째였을 때, 나는 아직 괜찮았다.


"시스템 정상. 건강 상태 양호. 정신 상태 안정적."


지구로 보고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매일 지영, 민우와 통화했다. 영상통화였다. 지연이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민우에게 물었다.


"그냥... 공부."


"친구들은?"


"잘 지내."


대화가 짧아지고 있었다. 민우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나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민우야, 아빠가 곧 돌아갈게."


"응. 알아."


민우의 눈빛이 공허했다. 나는 불안했다.


* * *


D+240.


8개월째. 발레리 폴리야코프의 수기를 읽었다.


"고독은 서서히 온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당신 안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나는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맞다. 고독은 서서히 온다.


통신 빈도가 줄었다. 지구는 바쁘다. 나만 여기 갇혀 있다.


지영과의 통화도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었다.


"미안해, 요즘 일이 많아서."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나도 할 일이 많으니까."


거짓말이었다. 나는 바쁘지 않았다. 할 일은 정해져 있고, 시간은 너무 많았다.


민우와는 한 달에 한 번 통화했다. 그마저도 어색했다.


"공부 열심히 해."


"응."


"건강 챙겨."


"응."


대화가 끝났다. 나는 빈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내 아들이 나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 *


D+360.


1년째. 정확히 12개월.


나는 거울을 보았다. 수염이 길게 자랐다. 머리도 덥수룩했다. 면도하기 귀찮았다. 머리 자르기도 귀찮았다.


"권대장, 상태 보고 바랍니다."


김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주일에 한 번 정기 통신이었다.


"시스템 정상. 건강... 양호. 정신 상태..."


나는 말을 멈췄다. 정신 상태? 양호한가?


"권대장?"


"정신 상태도 양호합니다."


또 거짓말이었다. 정신 상태는 양호하지 않았다.


밤마다 환청이 들렸다. 지영의 목소리, 민우의 웃음소리.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우주정거장 뿐이었다.


대화 상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상상 속 친구를 만들었다. 이름은 '유리'. 유리 가가린에서 따왔다.


"유리, 오늘은 뭘 먹을까?"


"글쎄, 오늘은 치킨이 어때?"


"우주식 치킨은 맛없어."


"그럼 참아."


나는 웃었다. 미친 것 같았다. 하지만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 * *


D+437.


발레리 폴리야코프의 기록을 깼다. 438일. 인류 역사상 가장 긴 단일 우주 체류 기록.


지구에서 축하 메시지가 왔다.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438일. 그리고 아직 139일이 남았다.


지영과 통화했다. 한 달 만이었다.


"축하해, 여보. 세계 기록 깼잖아."


"응. 고마워."


침묵이 흘렀다. 예전 같으면 이 침묵을 채울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민우는?"


"잘 지내."


"그래?"


"그래. 좋은 일이지."


또 침묵이 흘렀다.


"여보, 나... 돌아가고 싶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순간 후회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지영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5개월 남았잖아."


"알아. 하지만..."


"권성준." 지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당신이 선택한 거야. 기록 깨고 싶어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간 거잖아.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지영 말이 맞았다. 이건 내 선택이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민우가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알아? 아빠가 없어서?"


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5개월만 버텨. 그럼 돌아올 수 있잖아."


통신이 끊겼다. 나는 빈 화면을 바라보며 계속 미안하단 말을 중얼거렸다.


* * *


D+500.


환각이 시작됐다.


지영이 우주정거장 안에 있었다. 복도 끝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사라졌다.


민우도 나타났다. 교복을 입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었다. "민우야."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까이 가자 사라졌다.


나는 의료 키트를 뒤졌다. 신경안정제를 찾아 복용했다. 환각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김박사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보고하면 프로젝트는 중단될 것이다.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나는 거울 속 나에게 말했다. 수척한 얼굴, 텁수룩한 수염, 핏발 선 눈. 이게 나인가?


* * *


D+540.


근육이 약해졌다. 매일 2시간씩 운동했지만, 무중력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뼈 밀도도 감소했다. 지구로 돌아가면 재활이 필요할 것이다.


심리 상태는 더 나빠졌다. 악몽을 꿨다. 정거장이 폭발하는 꿈, 지구가 사라지는 꿈, 가족이 죽는 꿈.


잠에서 깨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숨이 가빴다. 패닉이었다.


나는 매일 진정제를 복용했다. 효과가 있었다.


"유리, 나 미쳐가는 것 같아."


"알아. 다들 그래. 고독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어떻게 버텨야 해?"


"버틸 수 없어. 그냥 견디는 거야. 차이가 있어."


나는 웃었다. 상상 속 친구가 철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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