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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Apr 08. 2021

라다크와 기생충

책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4관왕을 이룬 작품이다. <기생충>의 수상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은 현대사회 개인의 욕망과 계급 이슈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김정섭 성신여대 교수는 <기생충>이 “빈부격차 심화로 공고해진 계급 문제를 ‘블랙 코미디’ 기법으로 나타낸 것은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 낸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기생충>은 비쥬얼(visual)적으로 모든 것이 계층화 되어있다. 이를테면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진 박 사장(이선균)의 집이 대표적이다.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계층화 되어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체제 속에서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에 기생하여 사는 구조를 단순화하여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신(新)계급주의의 모습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는 라다크 문화권이 글로벌 경제 체제로 편입되면서 어떻게 하위 계층으로 자리잡는지 단계별로 설명한다.


책에서는 라다크 사람들이 개발 전 가지고 있던 삶의 가치들을 먼저 이야기한다. 그들이 중시하는 가치는 ‘삶의 기쁨’이다. 이것은 현대의 개발된 사회들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를 지닌다. 특히, 개인의 행복이 갈등 없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발 사회가 인위적으로 공동체 조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순환적 흐름은 라다크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과 자원 활용을 꾸려가는지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하다. 비록 자본과 이익성이 오가지는 않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갖는다. 미래에 이웃들과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믿음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불교 교리인 윤회와 맞닿아 보인다.


하지만 라다크가 서구 개발 모델에 편승하면서부터 거시적인 틀이 깨지기 시작한다. 헬레나는 이를 순차적으로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다. 우선적인 문제점은 노동력과 자원이 서구의 전형적인 개발에 묶인다는 것이다. 균형에서 모든 요소들이 벗어나고, 개발이라는 명분에 기생하게 된다.


기생이라 표현한 이유는 당연히 서구 개발 모델이 가지는 한계점 때문이다. 본래 라다크 사람들에게 노동이란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가치였다. 하지만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노동이란 자본으로 환산되는 요소이다. 따라서 서구 개발의 입장에서 GNP(국민총생산) 등의 수치로 판단하자면 라다크는 가난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다크 사람들의 열등의식은, 또 다시 개발을 통한 재화 획득에 편중되게 만든다. 그들이 유지하던 친환경적이고, 미래지속성 뛰어났던 구조가 개발과 자본에 종식되어 버린다. 자본과 개발이 부재했으므로, 서구로의 의존성은 심화된다. 서구 개발 모델에서 라다크는 하위 계층, 즉 기생충이 된다.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이 박 사장의 자본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탈피하기란 어렵다. 기택이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것도 이를 내포하고 있다. 자본이란 서구의 개념이며, 결국 자본의 흐름 또한 개발된 소수 사회들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다크와 같은 제3세계권이 재화 획득을 위해 노동할수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장체제로의 편입과 상대적 열등감일 뿐이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서구와 같은 상위 계층이 선재(先在)하여 하위 계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서구 개발 모델에 편승하게 되면 기생충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다. 더구나 소유 자본/자원으로 수치화가 가능한 구조에서는 불가피하게 계층화가 일어난다. 10원 차이라도 덜 가지고, 더 가지고가 확연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은 노동력, 시간 등 모든 사물과 교환되기 때문에 신계급사회가 견고 해진다. 정서적 개념이었던 집조차도 <기생충>에서는 계층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계층화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 경쟁, 그 이상이다. 극단적인 종속성, 정체성의 약화를 불러일으킨다. 이 안에서 하위 계층이 행복을 도모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자립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계층 집단 자체가 상위로의 움직임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움직임이 있다고 해도, 또 다른 하위 계층이 발생한다. 소수의 개인만이 계급 이동을 이룰 수 있다. 이를 통해 공동체 의식은 파괴된다. 의미 없는 경쟁과 분열이 필연적이다. 라다크에서는 실제로 종교갈등, 남녀차별, 세대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현재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필수적이 되었다. 여기서 경쟁력이란 체제 속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차별화 전략을 뜻한다. 하지만 직선적인 모형의 국제 사회가 조성되고 있는 와중에 차별화를 논하기에는 모순이 많다. 실제로 크루그만 미 스탠포드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국가 경쟁력이란 근거 없는 개념이며, 세계화 또한 허상”이라고 언급한다. 결국 국제 사회는 차별화를 가장한 획일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획일화 되어 가는 사회, 그 안의 분열과 경쟁은 장기적인 존속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현재 거대하게 일어나는 친환경 운동, 삶의 질 회복 운동 등은 이를 대변한다. 따라서 라다크와 같은 운명적 하위 계층은 서구 개발 모델이라는 신계급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위 계층의 족쇄를 끊고, 자립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러한 탈계층화의 해결책으로 라다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라다크 사람들이 다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다. 태양열, 수력 등 에너지 자원을 장기 지속할 수 있도록 활용한다. 그들의 지형적 특성에 맞게 인간적 규모의 탈중심화를 꾀한다. 또한 라다크 사람들에게 지역중심 교육을 통해 열등의식이 아닌 자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자본이 투입된 이후의 삶에서 이를 전멸시키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이 오랜 시간 보존해왔던 가치들을 여기에 접목시키는 것은 필수적이다. 지역 중심경제체제를 도모하여 자립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립성 증대는 정체성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계층화를 부정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라다크 프로젝트와 <기생충>가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기생충>은 그의 해결책을 ‘근본적인 계획’의 수립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 돈을 벌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엔 어머니랑 저는 정원에 있을게요.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영화 <기생충> 中 기우의 대사


기우의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근본적인 계획이란 자본 획득을 위한 차별화 전략과 동일하다. 하위 계층의 탈피 의지를 의미하기는 하나, 완전한 탈계층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표면적인 기생에서 벗어나더라도 계층 내 이동만 수반한다. 정체성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위 계층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가 “계획이라는 것도 시스템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갖는 것이고 없는 사람은 패배의식만 남을 뿐”이라며 “그럼에도 빈자들은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슬프다.”고 언급한 것 또한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수의 제3세계권 국가들은 <기생충>과 같은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서구 개발의 표적이 된 대표적인 지역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은 개혁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하나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무역관은 개혁정책이 일반적인 행정상의 불합리함을 뜯어고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외국인 투자가의 진출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대규모 농업단지개발 7개년 계획, 지역별 경제특구 개발 등의 계획을 위해 외국기업 투자를 수용하려 했다. 이 전체는 <기생충>의 ‘근본적인 계획’과 다를 바 없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제3세계권 국가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라다크와 <기생충>을 비교하자면 제3세계권에 적합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라다크 프로젝트가 가지는 유의미함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비교 대상이 부재했더라면, 한 지역권의 개발 정책들은 모두 하위 계층 탈피의 방법으로 인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전부 ‘근본적인 계획’을 뜻하고, 기생충으로 치부됨을 깨닫아야 한다.


따라서 라다크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실은 서구 개발 모델의 하위 계층에 속하는 집단들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프로젝트 자체만으로도 미래지속성을 가지지만, 이것이야 말로 전 세계 미래의 지속을 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아무도 기생충으로 불리지 않는 미래의 지속 말이다. 이것이 바로 헬레나가 책을 집필한 결정적 근거이지 않을까?




참고 문헌


김정섭 (2020.02.11). 세계가 놀란 <기생충> 수상 쾌거와 그 이유. <프레시안>. Retrieved 22/10/20 from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77578#0DKU


남유철 (1994.12.08). “국가 경쟁력은 없다”. <시사저널>. Retrieved 22/10/20 from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379


김고금평 (2020.02.18). [다시 보는 ‘기생충’] 5단계로 읽는 ‘계획’에 대하여. <머니투데이>. Retrieved 20/10/20 from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21813430284251


이하나 (2017.04.27). DR콩고의 개혁 정책과 성과. <KOTRA & KOTRA 해외시장뉴스>. Retrieved 20/10/20 from http://news.kotra.or.kr/user/globalBbs/kotranews/3/globalBbsDataView.do?setIdx=242&dataIdx=158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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