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수록 풍요롭다』, 제이슨 히켈
제주도에서 새벽배송을 하던 30대 노동자 고 오승용 씨가 전신주와 충돌해 숨졌다. 고인은 매주 주 6일간 11시간 30분씩 노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최근 야간 택배노동자의 건강권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지만, 비슷한 사망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해 5월에는 노동자 고 정슬기 씨가 주 6일 동안 저녁 8시 30분부터 아침 7시까지 일을 하다 과로사했다. 당시 그는 동료에게 “개처럼 뛰고 있다”고 답했다. 비단 택배노동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7월에는 베이글 가게에서 근무하던 청년 고 정효원 씨가 회사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사망 직전 주 80시간을 일했으나, 회사는 유족의 산재 신청을 막으려 했다.
비슷한 사건은 반복된다. 그럼에도 새벽배송도, 야근도 ‘자발적’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계속된다. 이 비인간적인 노동은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지속된다. 도대체 수요-공급에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길래 이 비인간적인 노동이 지속되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온갖 종류의 첨단 기술이 발전한 21세기에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수요-공급을 목격하지만, 그것을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는 한다. 공장식 축산업에 의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좁은 우리에서 닭을 길러 생산된 저렴한 닭고기, 화재방지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의 제3세계 공장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투입하고 다량의 폐수를 배출하며 만들어진 패스트패션 같은 것들 말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저자 제이슨 히켈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이 되는 자본주의를 고찰하고 이를 벗어나는 탈성장으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확장된 역사를 설명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탈성장을 논하는 책에서 굳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공들여 설명함으로써 히켈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있기 전에도 시장과 교환은 있었다.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시장은 필요한 것만큼을 생산하고 거래하도록 작동했다. 문제는 유럽의 산업화와 인클로저 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농민에 대한 약탈과 착취로 된 이 운동은 공장이라는 대량생산 주체를 가동하게 하면서, 동시에 농민의 자급자족을 파괴함으로써 대량소비 주체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버는 이윤 추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히켈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성장이라는 정언명령”을 동력으로 움직인다. 기존의 자급자족에 기반한 시장경제와 달리 성장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정해진 끝이 없다.
사람들은 개인의 만족을 넘어선 이윤 창출과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더 빠르고 효율적인 기술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지만, 성장에는 어디까지나 대가가 따른다. 히켈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한 발전이 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생산은 필연적으로 자원을 필요로 한다. 모든 주위 환경을 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보고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순간, 원료가 되는 자연은 헐값에 거래된다. 자원을 얼마나 저렴하게 얻을 수 있는지 자체가 경쟁력이 되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더 많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그리고 착취를 불러일으킨다. 산업화로 인해 가속화된 자원에 대한 착취는 이미 생태적 한계를 한참 넘어섰으며, 그 피해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태적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으로 가정한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이 최대화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개인에 의한 공유지의 비극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화가 있기 전, 공유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각 마을의 관리 방식에 따라 유지되어 왔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이윤 추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자원은 필요한 만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사용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 하는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자원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
자본주의가 문제를 해결해 왔던 관성에 따라 사람들은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어떤 효율적인 기술을 기다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을 유지하되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녹색 성장’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성장을 추구하는 한 어떤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도입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장 지향의 경제하에서는, 생태적 영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효율성 개선을 성장 목표를 앞당기고, 채굴과 생산의 순환에 점점 더 많은 자연을 밀어넣는 데 이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성장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이미 체감하고 있다. 효율성이 개선되면 가격이 저렴해진다. 가격이 저렴해지면 사람들은 더 많이 구매한다. 즉, 수요와 공급이 함께 늘어나고, 경제성장의 지표인 GDP가 증가한다. 경제성장이 목적인 한, 효율성 개선은 생태적 위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장은 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에 성장이 계속되는 한 자원도 지속적으로 착취된다.
자연에서 성장이 멈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장기를 지난 생명은 커지는 것을 멈추고 점점 성숙해진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이와 다른 양상을 띤다. 우리는 GDP 성장이 멈추는 경우를 대단히 경계하고 있다. 성장이 멈추면 경제 침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의 성장은,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치며 이루어지는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방식을 채택하였지만, 당장의 경제적 위협을 피하고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성장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종속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사회가 추구하는 성장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며, 그 한계를 제시함과 함께 성장을 벗어난 새로운 대안을 상상해 볼 것을 유도한다.
성장에 기반한 착취를 일삼는 현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원치 않는 방식으로 가해자가 되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만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까지 모든 순간에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야근과 과로가 건강에 치명적임을 알지만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일을 부과한다.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반대하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물품 중 불공정한 거래가 개입되지 않은 물품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지부조화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괴리될 때 인간의 뇌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인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더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을 바꾼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인지부조화의 대부분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편이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쉽고 빠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감각해지는 편을 택한다.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모순을 줄이고 시스템에 순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착취당하는 상황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한 이 시스템에 우리는 함부로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순응할수록 개인은 착취하고, 착취당하며, 동시에 그 모든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무감각해진다. 자본주의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이 거대한 인지부조화의 틀과 자본주의라는 당연한 전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히켈이 말하는 탈성장이란 단지 GDP를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GDP에 의존하는 현 체제에 변화를 주어 경제를 팽창시키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불필요한 성장을 줄이고 정말로 우리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것에 투자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성장의 정언명령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러 종류의 혁신에 집중하는 데 자유로워질 것이다.
추출과 생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고안된 혁신이 아닌 인간의 행복과 생태적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혁신 말이다.
그는 “일정 지점을 지나면 더 나은 GDP는 인간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 있어 절대 필수적이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소득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그것이 공공 서비스에 얼마나 투입되는지”라고 말한다. GDP는 시장에 거래되는 모든 종류의 생산을 집계하는 지표일 뿐, 이 지표에 집계되는 모든 종류의 성장이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종류의 수요-공급은 정말로 사람들의 행복과 복지에 필요한 것이 맞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녁에 결제한 물건을 당장 다음 날 아침에 받아야만 한다면, 애초에 그러한 수요를 만들어 낸 분주한 사회 자체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이윤 창출을 위한 계획적 진부화와 광고가 인위적인 수요-공급을 만드는 현상 또한 경계해야 한다. GDP는 정말로 필요한 성장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지 못하는 한편, 자연 생태계, 인간적 교류, 돌봄과 양육 등 오늘날 사람들의 행복에 정말로 필요한 요소를 담지 못한다. 그러한 점에서 탈성장은 우리가 의존해 온 맹목적인 경제성장을 벗어나, 사람들의 행복과 복지에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재조명하고 이를 놓치지 않게끔 지표를 재설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도입될 때, 인간이 주위 환경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더 많은 자원을 추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 철학자들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이분화하고, 인간을 제외한 주위 환경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히켈은 이러한 인식 역시도 당연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 간의 관계를 존중해왔다. 자원을 활용했지만 필요한 만큼만을 활용했으며, 받은 만큼 되돌려주며 서로의 건강을 신경 썼다. 인간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가 그저 인간에 의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이며, 이러한 사고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거대한 규모의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다면 인간과 주위 환경이 맺어 온 본래의 관계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책의 끝무렵에 히켈은 이렇게 질문한다.
결국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서로와 맺는, 그리고 생명세계의 나머지와 맺는 물질적 관계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관계가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지배와 추출의 관계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호혜와 돌봄의 관계이기를 바라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이 관계 맺음의 방식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이 과로사하더라도 새벽배송을 받아야만 하는 사회는 어딘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저렴한 닭고기를 위해서 비좁은 우리에 닭을 가두어 기르는 것도, 유행하는 옷을 입고 빵을 먹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밤낮없이 노동하게 만드는 사회도 어딘가 이상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것이 경제 논리라는 이유로 이 불편함을 묻어둔다. 나 자신도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착취당하는 것에 순응한다. 히켈은 이 거대한 인지부조화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제기하고, 얼마든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선택의 주체성이 있음을 상기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불편한 진실이 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이 거대한 인지부조화를 어떻게 다룰지, 선택은 책을 덮는 독자의 몫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