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고칠이가 어렸을 때, 빨리 암기하는 머리는 있었다고 하신다. 엄마는 빨래를 하시면서 고칠이 하고 동생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한 적이 있으셨다.
2단부터 9단까지 하루에 한두 시간씩 따라 외우게 하면 고칠이는 3, 4일이면 거의 다 따라하는데, 그의 동생은
1, 2주일이 지나도 5, 6단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고칠이는 엄마가 9단까지 외워보라고 시키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 외우면 놀러나가도 되죠?" 하고 장사꾼처럼 흥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고칠이가 구구단을 외우기만 바라셔서 고칠이의 요구에 머리를 끄덕여 주곤 하셨다.
동생은 고칠이에 비하면 색달랐다. 동생은 엄마한테 흥정도 하지 않고 밖에 잘 놀러 나가지도 않았다. 엄마는 동생이 답답해 보였는지, 구구단을 다 외우면, 형처럼 놀러 나가게 해 준다고 해도 동생은 노는 거에는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다. 증세가 심하지 않은 소아강박증 환자처럼, 엄마가 말한 구구단에만 관심이 있었고 집착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동생이 구구단 외우는 속도가 너무 느려 당혹스러웠다고 하신다. 나중에 다 외우긴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말쯤에나 다 외운 거로 기억된다.
한 2, 3년 걸린 셈이다. 고칠이는 몇 주 만에 외우는 구구단을 말이다.
엄마는 "암기하는 머리로는 고칠이가 동생보다 앞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면 그가 동생보다 더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을까. 모든지 빨리 외우는 데 말이다. 하지만 고칠이는 금세 잊어 먹는다는 거다.
한 달이 지나서 물어보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었다. 고칠이는 외운 걸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항상 외우는 게 답답하고 오래 걸리는 동생은 거의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동생은 그와 달리 외우는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도 한 번 외우면 잘 잊어먹지 않는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밤 새어 다 외워 시험 본다는 소문도 돈다.
동생은 초등학교 5-6학년 때 야구선수가 된다며, 말 그대로 야구에 ‘올인’ 했던 때만 빼면 공부에는 완전 귀신이다. 결국 동생이 야구 길로는 못 갔지만, 그때 동생의 눈에는 야구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게 기억이 난다.
빨리 외우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고칠이. 그리고 늦게 외우지만 오랫동안 기억을 간직하는 동생, 결국 동생은 공부에는 달인이 돼서, 학생도 가르치는 위치에 올라섰다.
하지만 고칠이는 단순한 암기는 순간적으로 잘 해도 응용력이 없어 깊이 있는 공부나 일에는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는 많이 달라요 산업사회에서는 지식을 많이 갖고 있고 암기력이 강한 사람들이 소위 출세를 했어요. 그래서 명문대학의 박사급들이 선호됐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인 정보화 사회로 치닫고 있거든요. 정보화 사회는 지식정보를 인터넷 등을 통해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어요. 컴퓨터 클릭 하나만으로 도요. 지식을 머릿속에 암기해서 넣기 보다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느냐가 더 중요하겠죠. 그러니 고칠씨는 이젠 보다 자신감을 갖고 살아도 될 듯싶네요. 정보화 사회에서는 우리가 정보지식을 올바르게 이용할 줄 아는 정보 윤리의식을 키우는 게 지식 암기보다 더 중요한 일일 겁니다.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룩된 전자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모두 참여했던 아고라 집회처럼 정치에 대한 직접 참여가 손쉬워진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될 수가 있어요.
반면에 패높티콘(Panopticon, 원형감옥)처럼 개인이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통제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될 우려가 있는 거죠.”
“오늘은 제가 자신감을 갖게 되네요. 근데요, 저는 사실 응용력도 많지 않고요. 동생이 좀 더 컴퓨터 다루는 솜씨가 더 뛰어나고 그래요. 제 전공이 경영학과 컴퓨터가 융합된 학문인데요, 동생의 도움 받아 억지로 졸업했거든요.”
“고칠씨의 장점은 무지 ‘순박하다는 것과 겸손하다는 것’ 같네요!”
동생과 고칠이는 이런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다른 스타일이다. 그래서 서로 통할 것 같지는 않는 데도 고칠이는 동생을 벗 삼아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동생도 형의 모습이 순박하고, 진실 되어보인다며, 자신의 고민도 빼놓지 않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동생은 가끔 “고칠이 형은 암기를 게 눈 감추듯 눈 깜짝할 사이에 하고 쉽게 잊어버리지만, 한순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데,그 순간만큼은 형의 아이큐가 150이상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하곤 했다.
게 눈 감추듯 : 게가 평상시에 두 눈을 밖으로 내놓고 한가로이 돌아다니다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잽싸게 눈을 감추고 숨어버리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음식을 순간적으로 먹어 치우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