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의 차디찬 냉기와 함께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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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가 회화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 회화성이라는 것이 독자의 상상 속에 있는 것 하고 실제 그림으로 표현된 것 하고는 차이가 있다. 도서관에 간 배우자가 나를 위해 빌려온 백석의 시그림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곽효환 엮음)'를 본다. 그림이 함께 있어 읽는다보다는 본다는 행위에 가깝다.
상상이 왜 이미지네이션이냐 하는 생각을 한다. 경험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으로부터 생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머릿속 이미지를 내 눈앞에 현물로 보여주면 그때부턴 상상이 현재의 내 시각 안으로 가두어진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는 '눈이 푹푹'이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온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발바닥에 차오로는 겨울 눈의 차디찬 냉기와 함께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인의 모습이다. 오원배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거의 무채색으로 표현했다. 하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설은 때로 어둠과 같기도 하니.
'흰 바람벽이 있어'를 제목으로 최석운, 황주리 화가가 그린 그림은 가난하고 쓸쓸한 심상을 담아내기엔 그 화폭이 좁다. 워낙 시의 무게라는 것이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글을 그림으로 옮기거나 그림을 글로 표현하는 이차적 예술 행위는 독자까지 포함해 삼자의 공모가 맞아야 한다. 그 은밀한 공모가 맞으면 쓸쓸함은 배가하고 소주잔이 비워질 거다.
그래서 회화든, 문학이든 독립 자존을 기본으로 연결돼 있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오감을 다 동원해도 실제 작가의 심상에 다가서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은 창조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사이의 간극으로 밀고 들어와 머리를 흔들고 가슴을 울리는 거다.
아무튼 오늘은 백석을 만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