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교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교실밖 Jun 04. 2020

지훈이의 캔버스(5)

가끔 모순에 빠지는 평온한 인내

다시 3월이 됐다. 거짓말처럼 봄기운이 교정 여기저기에서 꿈틀댔다. 나는 연구부장을 맡아 오랜만에 담임 업무를 손에서 놓았다. 사실은 자청한 보직이었다. 이 학교는 부장교사를 평교사들의 투표로 뽑는 전통이 있었다. 몇몇 교사들과 하고 있었던 책 읽기 모임을 전면화하고 싶어서 자청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연구부장을 희망한 교사가 나 한 명뿐이라 교장은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부의 3월은 매우 바빴다. 학교교육계획서 작성, 수업연구 계획, 연간 학부모회 활동 계획, 교과협의회 운영, 지구 연구부장 회의, 교원능력개발평가 계획 수립, 포상계획, 학습 준비물 배부 계획 등을 세우는 일이 숨 가쁘게 몰려왔다. 다섯 명의 부서 교사들과 함께 하나씩 처리해 갔다. 학교교육계획서를 작성 때는 야근하는 날도 많았다. 3월 말에 있는 학부모 총회까지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내가 맡은 수업과 동아리 활동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교육학 공부모임에 참여할 교사들을 공모하니 모두 열두 명의 교사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읽고 토론하는 교원 학습공동체였다. 바쁜 3월, 한숨 돌리는 4월이 지나갔고, 푸른 5월이 왔다.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 행사는 생략하고 오전 수업 후에 아이들을 하교시켰다. 오후에는 은사를 찾아뵈라는 명목의 단축 수업이었지만 아이들은 일찍 끝난 즐거움에 운동장 가득 웃음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나 카드를 들고 왔었다. 몇 해 전 TV에서 학부모에게 선물을 받아 승용차의 트렁크에 싣는 교사의 모습을 찍어 보여주었었다. 선물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나 TV는 교사들이 여전히 선물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후 아이들과 교사, 가정과 학교의 관계는 한층 더 서먹해졌다.

내 평생 지켜온 '평온한 인내'는 가끔 모순에 빠진다. 불필요한 감정의 나눔이 피곤하여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시기가 끝나면 서로 깨끗하게 헤어지자는 내 말에 아이들은 실천으로 화답했다. 아이들은 진급하여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거나, 졸업하여 학교를 떠난 뒤에 정말로 다시 찾지 않았다. 자청하여 그리된 일임에도 아주 가끔은 허전함이 몰려왔다. 옆 자리에서는 졸업생들이 몰려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선생님과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점심시간이 임박했으므로 최 선생은  짜장면 값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합리화를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을 안고 물끄러미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작은 서글픔 같은 것이 몰려왔다.

- 내가 뭐 아이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카드라도 보내면 어디 덧나나? 아무리 내가 평온한 인내와 쿨한 헤어짐을 강조했기로서니 정말 메일 한 장, 문자 한 통 보내는 놈이 없구나... 이제 누가 찾아오더라도 소용이 없다. 난 이미 학교를 떠났을 테니... 내가 나간 다음에 누가 찾아오면 존경하는 수학 선생이 없는 허전한 학교를 경험하겠군. 뭐 영화나 한 편 보는 것으로 스승의 날을 자축할 수밖에...


나는 책상 서랍을 닫고, 캐비닛을 닫고,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 물건을 이리 놓았다 저리 놓았다 물색없이 정돈하였다. 혹시라도 내가 나간 직후에 누구라도 오면 어쩌지?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5분만 더 있다가 그놈은 보고 나가야지 하다가도 '이거 내가 뭐 하는 짓이지'하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이제는 냉정하게 나갈 시간'이라고 오금을 박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을 보았다. 지훈이가 그곳에 있었다.

"선생님, 퇴근하셨는 줄 알았어요. 저 막 뛰어 왔어요..."

지훈이 싱그럽게 웃으며 내 자리로 왔다. 지훈이는 그새 키가 훌쩍 컸고,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실 속으로는 많이 반가웠으나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부하느라 바쁜데 뭘 찾아오고 그러니. 난 사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저기, 선생님께 드리려고 제가 만든 게 있어요... "

지훈이는 가방에서 책갈피 사이에 있는 카드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지훈이가 손수 만든 카드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하루 종일 걸렸을 것 같은 만듦새였다. 내가 전에 나누어 준 도화지를 오려 레이어 형태로 겹겹이 붙여서 만든 카네이션이 환하게 빛났다. 꽃과 이파리, 줄기를 정교하게 표현한, 너무 충분하게 훌륭한 작품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아이들에게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쳤다. 나는 겨우 '고맙다 지훈아'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목이 조금 메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지훈이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카드 뒷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지훈이가 나에게 주는 한 줄의 글이 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문장이었다.

"선생님은 저를 최초로 인정해 주신 분입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지훈이의 캔버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지훈이의 캔버스(4)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