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 집단화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여러 연구와 사례는 학습조직이 가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전한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크고 작은 학습공동체들이 있었다. 최근 시도 교육청에서는 교원학습공동체 운영을 '정책적으로'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학습공동체 운영 사례들은 주로 '방법론'과 '성과'에 치우쳐 있다. 성과를 말하는 대체적인 흐름은 ‘모여서 무엇을 했더니 만족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학습공동체를 주제로 강의할 때마다 빼먹지 않는 것이 학습공동체 담론의 함정이다. 학습공동체가 정책적으로 주어지면 ‘인위적 집단화’를 동반한다. 학습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생성-유지-발전-소멸을 단계를 밟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위적 집단화는 구성원의 개별성, 고유성을 반영하지 못해, 결국 '공적 필요'만 강조하다가 개인을 파편화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구 소련의 교육자 마카렌코와 수호믈린스키는 모두 교육의 목적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간형'을 기르는 것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접근 방식은 사뭇 달랐다. 마카렌코는 사회주의적 인간형의 완성을 위해서 '집단'에 무게를 둔다.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수호믈린스키는 개인에게 일어나는 교육적 경험과 성과를 중시했다. 수호믈린스키가 집단교육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개인에게서 발현되는 지적, 예술적, 도덕적 역량을 중요하게 보았다. 이러한 역량이 개별 인간의 건강한 몸과 일상의 노동을 통해서 길러진다고 본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치하였지만 사실상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전인적 발달'에 교육의 초점을 두었다.
학습공동체가 집단의 목표에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것(종종 이 같은 과정은 공동체의 미덕으로 포장된다)은 얼마나 개인의 특별한 욕구들을 담아내면서 지속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린 개인의 고유성을 도외시한 집단정신이 결국 '전체주의'를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때 학습공동체의 리더가 살펴야 할 것은 개인의 욕구와 공공의 이익이 만나는 지점을 정교하게 포착하고 이것이 활동 속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위적 집단화가 주는 '형식' 속에서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본연의 과제보다는 투입-산출의 고전적 성과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앤디 하그리브스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장된 동료성'으로 명명한다. 가장했다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인공적인(artificial), 허위의(false), 자연스럽지 못한(unnatural), 심지어 강요된(forced) 등의 의미를 내장한다(하그리브스, 1994; 하그리브스 & 풀란, 2012). 지난번에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시도 공동 전문직 임용 예정자 연수 때 필자의 기조강연을 통해서, 그리고 서울 중등 전문직 임용 예정자 연수 마지막 강의를 통해 내가 강조한 측면들과 맥을 같이 한다.
학습공동체는 '문화화'되는 과정을 거쳐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게 마련인데 가령 1년 단위의 운영-성과보고 방식의 단기 정책 접근으로는 부정적 측면들만 더 확대 강화될 위험이 있다. 물론 똑 떨어지는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누스바움의 말을 빌려 늘 이야기하는 <서사적 상상력과 사회적 정의>를 결합하는 시도 속에서 '의도적으로라도' 천천히 문화화해 가는 과정,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있는 대화들, 질적 성과물들, 성장하는 개인들, 욕구와 공익 사이를 보는 시선 등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아니라면 지금의 학습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연례적 성과 놀음으로 전락할 것이다.
앤디 하그리브스와 셜리는 가장된 협력성이 전문적 학습공동체와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 등의 개념 속에 잠복해 있다가 책무성, 표준화 개혁과 조우하면서 더욱더 파괴적인 분신과도 같은 모습의 '전문적 수행 분파 체계'와 '데이터에 기반한 혼란'의 양상으로 부활하였다고 분석한다(하그리브스, 2002; 하그리브스&플란, 2012; 하그리브스&셜리, 2009; 정바울, 2012, 재인용).
앤디 하그리브스의 생각을 잘 전파하고 있는 정바울(2012)은 그의 학문 세계를 '가장된 동료성'과 그 변주를 중심으로 조명한다. 아래에 그의 글을 부분 발췌하여 소개한다.*
가장된 협력성과의 결합은 단순한 물리적 결합 그 이상이었다. 하그리브스와 풀란(2012)은 가장된 협력성의 재강화로 인해 ‘전문적 학습 공동체’가 ‘전문적 시험성적 공동체’로 굴절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로 인해 즉각적이고 단기간의 성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어 뒤르켐이 지적한 '집합적 흥분(collective effervescence)'의 교직 문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Hargreaves & Shirley, 2009).
이러한 변화의 국면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은 까닭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가장된 협력성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전문적 학습 공동체의 몰락을 초래할 수 있는 씨앗이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된 협력성이 재 활성화되었을 때 교사들은 교육자로 서의 자신들의 도덕적 목적을 상실한 채 단기간에 성적을 최대로 올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커트라인 바로 밑의 학생인 ‘거품 아이들(bubble kids)’만의 시험 점수 향상에만 치중하게 될 수 있었다(Booher-Jennings, 2005).
이 과정에서 교사들을 관료제적이고 마키아벨리적인 교육정책가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그저 순수한 인형들과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것은 절반의 그림일 뿐이다(Hargreaves & Shirley, 2009; Shirley, 2011). 나머지 절반의 그림은 이런 식의 현재주의적 처방이 주는 즉각적이고 반복적인 엑스터시에 매료되고 중독되어가는, 기쁨이 넘치면서 동시에 진이 빠진 듯한 심한 활동 과잉의(hyperactive) 교사들의 모습이다(Hargreaves & Shirley, 2009).
이 글은 2018년에 있었던 앤디 하그리브스의 동료인 셜리 교수 초정 국제세미나를 앞두고 급하게 정리해 본 것이다. 나는 그때 청중들이 학교교육 제4의 길, 그리고 한국의 혁신교육 등에 대하여 질문할 것이라 예상했다. 거시 담론과 혁신교육을 이론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렇게 유익할까 하는 의문이 있다. 물론 예외 없이 그런 질문들이 있었고, 셜리 교수는 '중간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학습공동체를 정책적으로, 문화적으로 접근하면서 그것이 가진 인위적 집단화의 위험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개별 욕구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접점을 만들고 키울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얻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정바울(2012). 앤디 하그리브스의 학문 조명: '가장된 동료성'과 그 변주를 중심으로. 교육행정학연구, 30(1), pp.679~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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