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의 절제와 균형이 없을 때 벌어지는 극단적 선택
사람은 자주 보거나 듣거나 느낀 것에 대하여 친밀감을 느끼는 존재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온라인 네트워크 알고리즘이다. 이에 관하여는 지난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당신이 보는 유튜브 채널과 소셜미디어가 전시되는 방식은 당신의 온라인 사용 흔적을 충실히 따른다. 이에 대한 부작용 중 대표적인 것이 부지불식 간에 알고리즘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당신의 생각을 좁게 가둔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주와도 같이 넓디넓은 네트워크에서 당신은 극히 일부만을 본다. 처음에는 가볍게 공감하다가 공감이 몇 번 반복되면서 적극성이 높아지면 마침내 빠져들고 결국 신념화한다. 남은 것은 빠져나오기 힘든 확증편향과 선택인지의 세계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따라가는 경로이다. 균형과 절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시원하게 내지르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당신의 유튜브를 펼쳐보라. 당신이 종일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가 그곳에 있다. 나는 이것의 극단적인 경우가 이번 계엄령 선포 사태라는 강한 의혹을 갖는다. 보수든 진보든 잘 나가는 유튜브 채널의 특징 중 하나는 '뚜렷한 진영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는 익숙한 것만 본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이 익숙한 것만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사용하는 어휘를 살펴보면 유독 '극우 유튜버'가 자주 쓰는 용어가 많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라는 작년 광복절 축사의 문제인식은 이번 12.3 계엄령 담화문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문서의 일부를 보자.
"저는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저는 이 비상 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
평균적 시민의 문제의식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이 분의 문제인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바, 계엄을 통해 어디를 장악하려고 했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국회, 선거관리위원회, 특정 여론조사 회사 등 세 곳이다. 국회 장악은 계엄령 해제 표결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 치고, 선관위나 여론조사 회사에 무장 군인이 들어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까. 그동안 극우 유튜버들은 선거가 끝날 때마다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 왔다. 대법원에서 기각 결정을 한 이후에도 선관위를 털어 서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게임군이 선관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릴 때 시민들은 "언론사도 아니고 왜 선관위?"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번 계엄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전 국방부장관은 "부정선거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선관위에 계엄군을 투입했다"라고 말했다. 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가질 때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절차로써 '완료된' 선거를 뒤집겠다는 동기를 가졌다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아마도 이를 주장했던 극우 유튜버들은 "의혹을 현실화하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민주적 소양을 갖춘 사람은 지금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공적 규범과 절차가 무엇인지 안다. 이 공적 규범과 절차는 시민 모두가 사회의 안정을 위해 약속한 '법과 원칙'이다. 최고 권력자는 그것을 어겼다. 최고 권력자의 사고 체계와 일반 시민의 상식은 지금 매우 거리가 멀다. 모든 시민들은 실시간 중계가 가능한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다. 이는 정교하게 짜인 각본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한국에서 내란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의 방증이다.
극우 유튜버들이 이토록 '성실하게' 부정선거 의혹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명의 정치인 출신 인사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의 행위는 그냥 관심을 끌어보려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바람을 넣고 있는 극우 유튜버들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극우 유튜버들의 더 큰 동기는 막대한 수익에 있다.
나는 비교적 조용한 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쓴다. '응원'이라는 메뉴를 설정한 후부터 일종의 후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만 원, 5만 원, 2만 원, 1만 원... 처음에 나는 놀랐다. 이게 글값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일 뿐. 후원금이 통장을 들어왔을 때 작가와 플랫폼이 6:4 꼴로 분배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구조는 대단히 비즈니스적이다. 여기서 펼쳐지는 흐름은, 작가는 글을 쓰고 독자는 후원한다는 단순한 것에 있지 않다.
아무리 좋은 글도 노출이 되지 않는다면 후원을 받기 힘들다. 작가의 노력에 의한 노출이 10%라면 플랫폼에서 인위적으로 노출시켜 주는 것이 90% 정도 된다. 그러니 작가들은 글의 질보다 노출이 잘 되는 쪽을 택한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플랫폼에 올라가는 글의 질이 하락한다. 내가 경험한 것은 이 정도로 사소하다.
그런데 유튜브는 보다 극단적인 사용 행태를 갖는다. 우선 '좋댓구알(좋아요, 댓글, 구독, 알림 설정)'을 많이 받는 영상에 수익이 따른다. 유튜브는 구독료를 내는 고정 구독자에게는 광고를 붙이지 않는다. 그 외에는 광고를 붙여 영상 제작자와 수익을 배분한다. 영상 제작자는 영상 안에 광고를 삽입하여 직접 상품을 홍보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정보의 상품화' 과정을 따른다. 사실 정보의 상품화라기보다 '수다(아무 말 대잔치)'의 수익화에 가깝다.
내 경험으로 보아 유튜브 구독자 층에는 몇 개의 그룹이 있다. 교양과 상식을 넓히기 위한 그룹은 그런 영상을 찾아 구독하거나 후원한다. 이 글과 관련한 두 개의 큰 구독자 층이 있는데 매우 강력한 보수, 진보 팬덤 그룹이다. 이들은 많은 시간 영상을 시청해 줌으로써 제작진의 수익 창출에 일조한다. 그중 잘 나가는 곳은 일 년에 수십억을 벌어들인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멈출 수 없는 수익원인 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상을 제공하는 측과 플랫폼 소유자는 수익 배분을 통하여 공생한다. 광고주는 자본을 대고, 시청자는 '좋댓구알'로 상품성을 높여준다. 이 초경쟁적 네트워크 자유 시장에서 시청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사실상 '절제와 균형' 밖에는 없다. 시청자가 절제와 균형을 잃었을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이번에 우리는 절제와 균형 감각을 상실한 최고 권력자의 폭주를 체감했다. 이는 그 사람이 극우 유튜버들의 선전과 선동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언어는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획득한다. 특정 언어에 갇힐 때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좁게 설정한다. 자기편에서 옳고 그름을 선명하게 가른 다음 신념화한다. 대부분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의 고착화한 사고가 나오는 지점이다. 문제는 신념화와 권력이 만났을 때다. 극단적인 것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다. 네트워크와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대하여 여러 번 강조한 바, 사용자의 절제와 균형이 없을 때 언제든 극단적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지금 보고 있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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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오늘 사진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