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경력을 크게 ‘개발자 → 편집자 → 그다음(?)’ 나눠 살펴본 1부에 이어, 이번에는 개발자 시절의 이야기를 회고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발과 관련한 경력을 크게 토막 내 보죠.
1990년에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만든 그럴듯한 프로그램인 ‘Wegra’가 탄생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중간중간 휴학 후 취직하여 학비를 버는 등, 항상 학교 외의 조직에 소속되어 무언가를 만들었습니다. 군대에서도 운 좋게 전산병으로 착출되어 사단 전산망을 관리하면서, 틈틈이 프로그래밍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 신분일 때도 재미난 일이 많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졸업 후부터일 테니 삼성전자부터 시작해야겠군요. 그럼 제가 저는 어떤 계기로 팀을 떠나고 무엇을 보고 새로운 팀을 선택했는지를 다음 순서로 살펴보겠습니다.
삼성에는 안 갈 겁니다(감)
떳떳함 충전을 위한 품질 보증
가상 머신의 세계로
학위냐 실전이냐
핵심 인력이 되고파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비정한 이권 다툼의 세계를 뒤로 하고..
저는 대학 시절 삼성소프트웨어멤버십의 신세를 졌습니다. 삼성소프트웨어멤버십은 삼성전자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 대상으로 운영하던 비영리 제도로, 컴퓨터 관련 학과 학생들이 서로 교류하며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습니다.
저는 멤버십 면접에서 “삼성에는 입사할 생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멤버십이 삼성 입사의 관문처럼 변질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어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작은 기업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개발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랬던 제 생각을 바꾸게 된 건 한 선배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회사에서는 하고픈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지만, 자금이 떨어지면 결국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큰 기업에서는 내 뜻대로 하긴 어렵지만 윗사람만 잘 설득하면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녔던 회사들도 자체 아이템보다는 SI 쪽으로 점차 기울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던 터라 더욱 그렇게 들렸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됩니다.
당시 멤버십 회원들은 대부분 소속 부서를 입사 전에 협의할 수 있었습니다. 공급은 적고 수요는 많았기 때문이죠. 저는 기술총괄 소프트웨어센터의 품질보증팀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원서에 제 인생 로드맵을 제시했죠.
<이직의 기억 1편>에서도 보여드린 그림입니다. 품질 보증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어디 가서든 “이 제품은 내가 만들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1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기존의 여러 경험 덕분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의 거의 전반을 가볍게 맛볼 수 있었고, 깔끔한 설계와 코드, 버그 없는 제품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제 성향을 만족시키려면 품질 보증을 전문적으로 배워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사히 팁에 들어와서 여러 프로젝트의 품질과 생산성 개선을 지원하며, 테스트용 라이브러리도 만들고 논문도 쓰는 등 나름 보람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2년을 채우고는 로드맵대로 개발 부서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개발 부서는 자바 가상 머신을 개발하던 팀이었습니다. 당시 제 주력 언어가 자바였어서 애착이 있었고, 과거에 이 팀의 가상 머신을 검증하는 일에 지원하면서 인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팀 이동 후의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팀의 주 업무는 당연히 가상 머신 제작이었고, 당연히 저도 그 일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브 과제로 자바 명세 표준화(JSR 278)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3~4개월 정도면 끝난다면서 이쪽을 지원하는 일이 배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도하는 표준이라서 성공만 한다면 의미 있는 성과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핵심 회원사 한 곳에서 비협조적이어서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늘어지는 와중에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조직 개편의 일환으로 팀 전체가 다른 사업부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합류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고, 핵심 인력은 아니었기에 함께 갈지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애초에 제 희망대로 가상 머신을 개발하고 있었다면 달라졌을까요? 언제 끝날지 모르겠는 표준화에 흥미가 떨어진 저는 다른 선택지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대학원을 갈 것이냐, 실무를 더 할 것이냐를 고민했습니다. 카이스트에 원서를 넣고, 매트릭스라는 개발팀에도 팀 이동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매트릭스는 IoT 시대를 대비한 미들웨어 플랫폼이었습니다. 아키텍트로 성장하길 바랐고, 개인 프로젝트에서도 항시 공통 기능을 뽑아내 나만의 라이브러리를 갖춰 활용하던 저였기에 매력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더구나 팀의 리더는 당시 소프트웨어센터에서 전설적인 엔지니어로, 추후 삼성 바다(bada) 플랫폼을 론칭한 주인공입니다.
카이스트 서류를 통과한 상태에서 매트릭스팀으로부터 OK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학업은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저 분과 일할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들 거야’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는 면접 자리에서 인사만 드리고, 매트릭스팀에 합류했습니다.
매트릭스팀에서는 많은 경험을 쌓으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팀은 ‘아이폰에 대항하는 모바일 플랫폼 제작’ 체제로 급하게 재편되었습니다. 엔지니어라면 도전해보고 싶은 멋진 목표였지만,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제약 때문에 제 스트레스는 급격히 치솟았습니다(자세한 이야기는 <바다 이야기: 죽음을 향한 행진> 참고).
그런 와중에 제가 팀 이동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리더들이 팀원을 성장시키는 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리더가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가까웠던 몇 분께 여쭤보니 “그건 개인의 책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남아 있던 미련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팀에서 좀 더 큰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불만을 늘어놓는 대신 직접 행동하고 결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커져버린 바다팀을 떠나 팀원이 8명뿐인 작은 팀으로 옮겼습니다.
아쉽게도 핵심 인력이 되겠다는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이 팀에서는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핵심으로 파고들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리더의 성향과 능력을 간과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합류 시 8명이었던 팀원이 1년 만에 80명 정도로 늘었습니다. 당시 제 직급은 겨우 선임(대리)이었습니다. 그래서 팀이 커질수록 제 위로 사람들이 채워졌고, 제가 맡은 일의 범위도 점점 축소됐습니다. 그에 따른 아쉬움을 토로하자 리더께서는 “우선 책임(과장) 달 때까지만 기다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삼성 같이 거대한 기업에서 직급을 무시하고 조직을 꾸리기는 어렵다고 하셨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누구나 인정하는 인재라면 예외였겠지만, 제가 그런 인재는 아니었으니까요.
아쉬움이 있었지만 불만은 없었습니다. 많은 일을 겪다 보니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천포라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어쨌든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너무 달콤한 유혹이..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실리콘밸리에 회사를 세워놨고,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있답니다. 멤버도 저 포함 다섯 명이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미국 변호사 지원으로 취업 비자 취득도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템도 당연히 흥미로웠고요. 제가 퇴사하면 곧바로 실리콘벨리로 날아갈 계획이었습니다.
제 계획은 이랬습니다. 플랜 A는 당연히 이 아이템에 집중하여 성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타트업 대부분이 망한다는 건 상식이기 때문에 마냥 성공을 낙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랜 B도 생각해 뒀습니다. 첫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제겐 취업 비자가 남습니다. 미국에서 몇 년은 더 버티며, 적어도 영어 실력은 수준급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봤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련의 사건으로 플랜 B는 시작도 못 해보고 끝이 났습니다. 사기를 당한 건 아닙니다. 싸우고 헤어진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의 개인사도 포함되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왕 대기업에서 나왔으니 스타트업 세계를 좀 더 탐험해 보기로 합니다.
제가 겪은 스타트업 세계는 비정했습니다. 몇 년 지기 친구, 선후배, 오래 함께 한 협력사 같은 게 큰 의미가 없더군요. 이권 앞에서 이용하고 헐뜯고 뒷통수 치는 일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아마 대기업에서도 위로 올라가면 이런 정치 싸움이 치열했을 겁니다. 제가 거기까지 올라가 보지 못해서 경험하지 못했겠지요.
저는 주로 남들이 이용하려는 포지션이었습니다. 저는 갈등을 좋아하지 않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립 세력들 사이에서도 두루두루 잘 지냈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열면 서로 이해할 수 있어 보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 대부분 한쪽 편에 서서 다른 편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을 일부러 조장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느 쪽과도 마찰이 없던 사람이다 보니, 급기야 “이 사람을 내칠 테니, 네가 이 일을 맡아달라”는 제안까지 들어오더군요. 잘 되면 몇 백억까지 커질 프로젝트였으니.. 만약 성공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면 덥석 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판에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소위 ‘정치질이란 이런 거구나’를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출판 편집자’로의 전업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 같습니다.
이직(팀 이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존 회사(팀)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했던 점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이지, 잘못이 전 회사에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때로는 제가 너무 이상만을 좇아서, 성숙하지 못해서, 너무 성급해서, 잘못 판단해서 이직을 했습니다. 그래도 많이 시도했고, 경험했고, 또 성숙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앞으로의 저에게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주겠죠?
그럼 곧 (흥미 없으시겠지만) 편집자 시절 이야기를 정리한 3부에서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