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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남 Apr 08. 2021

이 집이 내 집이다 왜 말을 못 해

나는 분명히 여기 사는 사람인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이사를  많이 다녔다. 살면서 평생 이사했던 횟수와 비슷할 정도로 자주 거처를 옮겼던  같다.  번째 룸메이트 H 런던을 떠난  더블룸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한동안 싱글룸에서 사치를 부리면서 살았다. 그러다 브리스틀에 있던 친구 J 런던으로 오면서 트윈룸으로 옮겼고,  친구와 트윈룸 모험을  두어 번쯤  했다. 어차피 같은 사람이랑 살고, 어차피  트윈룸으로  거면서  굳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지는  기억이  난다. 아마 같은 동네에서 계속 사는  재미가 없어서 혹은 조금이라도  아껴보려는 요량으로 그랬으리라. 한국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J 그보다 조금  오래 런던에 남아야 하는  사정 때문에 그랬던  같기도 하고.


투어가이드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이드 숙소에서 지냈다. 숙소라고 하자니 거창해서 민망한데, 이곳은 S 사장이 관리하는 플랏들 중 하나로 나와 동기 I 말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살았다. 차량 투어 미팅 장소와 가깝고 히스로 공항으로 픽업 나가기도 편리한 위치라 사장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보 투어만 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나는 트윈룸 중 하나에서 살았는데, 늘 룸메이트가 있었던 건 아니라서 혼자서 방 하나를 차지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회사 제공 숙소라고는 하지만 월세도 착실하게 냈다. 백 퍼센트 다 낸 건 아니고 S 사장이 직원 할인을 해 준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는 저렴하게 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두 명분의 월세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 셈이었으니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다.



S 사장은 이 가이드 숙소뿐만 아니라 런던 이곳저곳에 플랏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본인 소유인 건 아니고, 서브렛(sub-let)이었다. 이쯤에서 서브렛이 뭔지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브렛은 런던에서 오래 지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본인이 세 든 곳에 다시 한번 세놓는다는 뜻인데, 많은 한국인들이 다른 한국인의 서브렛에서 살아봤을 것이다. 나의 경우 J와 살았던 모든 플랏이 서브렛이었다. 영국의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구할 수 있는 매물은 높은 확률로 서브렛인데, 문제는 이게 불법이다.


서브렛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원 계약보다 인원을 늘려서 받는다. 예를 들면 혼자 사는 더블룸으로 계약한 방을 트윈룸으로 만들어 버린다든가, 원래는 거실이지만 사람이 살 수 있게 손을 본다든가 하는 식이다. 당연히 본인이 원래 집주인에게 내는 돈보다 수중에 떨어지는 돈이 더 많으니 많은 사람들이 부업처럼 서브렛을 한다. 하지만 집주인들도 바보가 아니다. 비싼 주거비로 악명 높은 런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놓은 집을 점검(inspection) 하기도 한다. 다른 플랏에서 살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다가 가이드 숙소에 살면서 이 서브렛과 점검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슬프게도 이 숙소 집주인은 엄청나게 점검을 자주 왔다.



가이드 숙소의 집주인은 중국계 할머니였는데, 어찌나 깐깐한 지 한 달에 거의 한두 번씩 점검을 와서 내 피를 말리곤 했다. 몇 차례 겪고 났더니 이 할머니가 서브렛 사실을 눈치챈 거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마저 들었다. S 사장은 각 방에 한 명씩 총 3명이 사는 걸로 계약을 한 모양이었지만, 내가 이사 왔을 때 이곳은 무려 6명까지 살 수 있게 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마법 수준이다. 이 점검은 위생단속처럼 불시에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 몇 날 몇 시쯤 방문하겠다는 약속에 오히려 더 가까웠다. 내심 그러면 점검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긴 했지만, 아마 입주자들의 생활을 존중해서겠지. 어쨌든 점검 온다고 하면 나와 동기는 몹시 바빠졌다. 미리 안다고 해서 불법이 합법이 되는 건 아니기에 그 전날이나 당일에 S 사장과 셋이서 이층 침대를 분해하고 침대 매트리스를 숨기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 법석을 피운 다음날이면 온몸이 아팠다.


몸이 아픈 것까지는 괜찮았다. 아니, 사실 하나도 안 괜찮지만. 야간투어 마치고 돌아온 밤 11시에 침대 분해했던 걸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 S 사장 입장에서야 남들 다 하는 서브렛 좀 했기로 소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혹은 재수 없게 주인 잘못 걸렸다 싶은 정도였겠지만, 거기 사는 직원인 내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직업에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 플랏의 관리인 노릇까지 하고 있어서 퇴근 후에도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런 신체적인 고단함보다 나를 더 불편하게 했던 것은, 나는 분명 그 집에 사는 사람이면서도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사실이었다. 점검 오는 날이면 룸메는 휴일인데 '자기 방'에서 쉬지도 못하고 근처 카페로 피신해야 했고, 나는 '오늘 S 사장 대신 문만 열어줬을 뿐 살지 않는 사람'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이 사태를 한번 겪고 바로 다음날 방을 뺀 사람도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한 가지 거짓말을 덮으려면 열 가지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속이는 건 정말이지 할 게 못된다.


 드라마는 훗날 내가 귀국할 무렵 집주인 할머니에게 싹싹 비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 물론 내가 빌었다. 피치 못할 급한 사정 때문에 단기로 S 사장 대신 여기서  명이 살고 있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깨끗하게 겠다고 최대한 불쌍한 척을 했다.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서  말을 듣고 있던 집주인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난 당신들 중 누구 하고도 계약한 적 없어요. 그쪽 나라에서는 이게 돼요?"

"아니... 안되죠..."

"그런데 나 보고는 이해해 달라고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껴졌다. 머리를 조아리며 너무 급해서 그랬다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 제가 입이   아니    개라도  말이 없습니다. 제가 죄인이죠.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셔서  말이 없었다.  죽어도 도덕 운운하는 선비 같은 성미에 상처만 잔뜩 남긴 , 나는 그렇게 가이드 숙소와 이별했더랬다. 정말 별짓을 다해봤네.



눈치챘겠지만 투어가이드 시절 이야기 중 대부분의 지분을 S 사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 사람 그냥 S 사장 욕이 하고 싶었나' 할 정도라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변호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S 사장을 볼 때면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사업하는 거 보면 참 재능 있고 똑똑하고 아이디어 넘치고 에너지도 넘치는 사람이라 대단하다 싶고 또 본받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떨 때는 마른나무에서 물을 짜 낼 기세라서 진짜 저렇게는 살지 말자고 다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사람이 아등바등 살다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가. 이걸 산다고 할 수 있는 건가. 하루하루 버티는 거에 더 가까운 거 아닌가. 하긴 나보다 훨씬 더 옛날, 한국인도 별로 없을 때 타지에 와서 갖은 고생은 다 했겠지. 악착같이 살았을 테고. 이제는 먹여 살릴 가족들까지 있는 이의 심정을 내가 어찌 다 알겠냐마는. 저 사람은 행복할까. 저 사람은 하루가 끝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 보면 그가 한없이 작고 불쌍해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들으면 S 사장은 그야말로 악덕 사장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힘들다고,  외롭다고 한숨 쉬던 날이 있었다.  주제에 누굴 동정하고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런던이라고  그렇게 인생이 온통 장밋빛이겠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런던에 오면 모든   좋아질  알았다.     있을  같았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일들만 가득할  알았다. 가이드만 되면 영원히 해피엔딩에 머무를  알았다. 하지만 삶은 순간에 멈춰진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걸 이어나가는  매번 녹록지 않아서 살아도 살아도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책임질 것들과 매여있는 것들, 소중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삶은  위태롭고 팍팍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S 사장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던  같다. 반박할 수도 없을 만큼 내가 지금까지 정말 쉽고 편하게 살았다는 . 살다 보면 시궁창 같은 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 그런 날이  예상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 럼에도 내가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무언가가 있다는 .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에 비자니 세금이니 '합법'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달콤한 지도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내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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