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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학용 Oct 25. 2020

#1 아이들은 혼자일 때 어른이 된다

레,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그 도시에서 길을 나서다

“우왕~! 삼촌, 아프리카 같아요!”

“진~짜! 대박! 이런 공항 처음이에요!”


열일곱 살 동갑내기 민아와 다혜의 목소리가 오선지악보의 ‘높은 도’ 언저리에서 날아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라다크(Ladakh) 수도 레(Leh)는 해발고도 352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인도 뉴델리에서 레까지의 그날 비행은 히말라야 바다를 건너는 항해라 해야 할 만큼 장관이었다. 따라서 공항에 착륙했을 때 우리들의 설렘은 이미 해발고도만큼이나 상승해 있었음은 어쩌면 당연했다.


공항은 비행기 한두 대 겨우 이착륙할 것 같은 활주로와 우리나라 읍내버스터미널을 연상시키는 낡은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사막인 듯 누렇고 건조한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더없이 황량하고 막막했음에도, 공기의 저항을 모두 떨쳐낸 양 파랗고 투명한 바람이 어쩐지 가슴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물기 없이 건조한 하늘 가운데 거짓말처럼 한 쌍의 무지개가 떠있었다.


이 모든 풍경들은, 우리들이 훌쩍 시공간을 이동하여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떠나왔음을 단번에 인식하게끔 했다. 뜬금없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프리카를 아이들이 떠올린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가장 낯설고 멀리 있는 세상이 흔히들 아프리카이곤 하니까.


히말라야 설산 파노라마가 창문 밖으로


오랫동안 나는, 여행이란 익숙하고 편리한 나의 시공간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하여 낯선 길을 걷고 낯선 타인과 만나며 낯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이 간혹 낯설고도 그리운 자신을 만나 낯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일이 여행이라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이들은 이날 레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에 여행의 본격적인 국면으로 불쑥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를 문득 눈치 차린 아이들도 더러 있었으리라.       


“레 공항에 도착해 만난 화면은 내 생애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공항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히말라야 산맥을 보았다. 백두산 천지를 보면 3대가 착한 일을 한 것이라는데, 나는 히말라야를 보았으니 10대가 착한 일을 했나 보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남수)       


우리들은 뚝뚝(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 4대에 나누어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뚝뚝 엔진소리를 짱짱하게 건너온다.

설레임의 시작, 레의 거리

“삼촌~! 입술이 타고 숨이 차요!”

“뭐라고?”

“간간히 머리도 아파오고 어지럽다고요!”

“나도 그래~!”


하루아침에 고도를 3500미터 이상 올려놓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오래된 여행자인 ‘삼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아이들에겐 위로가 되겠지. ‘뚝뚝’이가 길을 내며 달려가자 오래된 라디오에서는 휘발해버릴 듯 건조한 바람을 타고 인도음악이 삐져나왔다. 툴툴거리는 음악이 주위 사막산과 먼지 날리는 길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다혜는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산 사진기를 들고 이 모든 풍경들을 다 담아내려는 듯 덤벼들었고, 민아와 진실이는 처음 듣는 인도음악 선율을 잘도 따라 흥얼거렸다. 여행이 빠르게 시작되고 있었고, 우리들은 라다크의 회색도시 속으로 푸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뚝뚝 기사인 ‘돌마’는 미로 같은 골목골목을 다람쥐처럼 빠져나가 첫 미션을 시작할 도심의 어느 거리에 열네 명 어린 여행자들을 내려놓았다. 라다크 여행학교의 첫 미션은 숙소구하기다.


내가 기획하는 여행학교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리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는다. 물론 볼거리를 알려주며 안내해주지도 않을뿐더러 ‘맛집’을 찾아 데려다주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야말로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학교다. 오히려 아이들이 불편함과 친해지기를 바란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 아이들은 3~5명씩 모둠을 지어 스스로 잠잘 곳과 먹을 것과 볼거리를 다 해결해야한다.


그것은 정해진 길을 따라 여행하기를 원치 않는 마음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학교와 집에서 정해진 규칙과 관행을 따라 걸어온 아이들에게 여행마저도 주어진 프로그램에 참여한 기억으로 남게 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길을 잃거나, 사기를 당해 돈을 잃고 음식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나더라도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그것이 무엇이었든 맘껏 해보았다는 만족감을 가져보길 원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6개월 전. 제주도에서 ‘여행학교 사전캠프’라는 이름으로 모였었다. 오월의 제주는 하늘과 땅에 사는 모든 것들이 푸르렀지만, 아이들은 모든 것을 낯설어했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낯선 캠프 방식에 대해서도. 우리들의 캠프는 캠프라고는 했으나 이렇다 할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다. 텐트를 치고 나면 하루 한라산을 오르는 것 말고는 2박3일의 시간이 통째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뭉텅뭉텅 빈 시간들이 그들에게 날것으로 던져진 셈이다.


하지만 그 낯섦과 어색함의 빈틈들을 매워가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이들의 힘은 신비롭다. 텐트를 치며 옥신각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쌀을 씻고 야채를 썰며 깔깔거렸고, 방금 만난 친구 손을 잡고 바다 끝자락으로 붉게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조개를 주우려 다녔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에 고구마를 구워먹자고 했더니 아이들 절반 이상이 나무꾼이 되어 산과 바다를 돌아다녔다.


이튿날에는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고 와서 늦은 밤 전등 하나 없이 용천수 노천탕에서 함께 목욕을 했었다. 한라산 지하 암반을 통과해온 그 차가운 얼음물에 맨몸을 담그고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노천탕의 천정 없는 돌담을 넘어설 때, 우리들의 캠프는 어느새 ‘여행’이 되어 있었다. 함덕바다에 두 개의 달이 뜨고 나는 우리들이 함께 한 그날의 경험들이 힘든 라다크 여행을 밀고 갈 동력이 될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함덕 바다에서 캠핑: 조개를 캐러 나서는 아이들
제주 함덕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는 아이들


제주도 캠프 후에 몇몇 부모님들이 궁금해 했다. 캠프를 어떻게 운영했기에 아이들이 저녁 내내 캠프와 친구 이야기에 몰입하는지, 또 이토록 들뜬 마음으로 여행학교를 기다리는지. 그런데 비결이랄 것은 없다. 다만 아이들끼리 있도록 해주었을 뿐이다. 무엇이든 그들끼리 해결하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나 역시 어른인지라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 때는 눈 질끈 감고 비켜주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대책 없이 물을 부어 찌개를 한강으로 만들어도, 텐트를 어설프게 쳐서 태극기도 아닌 것이 밤새 바람에 펄럭거려도, 그것이 목숨에 지장이 없는 한 그들의 여행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다. 그들끼리 놀고, 그들끼리 해결하고, 고생도 그들끼리 하도록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되는 것이다. 여행에 아이들이 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언제 어른이 되었는지 떠올려보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잊고 살아가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혼자일 때 어른이 된다는 사실!      


레의 낯선 거리 속으로 아이들은 모둠별로 짝을 지어 사라져갔다. 아마도 처음 와본 도시에서 힘들게 숙소를 찾아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알 것 같다. 방향감각을 찾고 길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숙소를 드나드는 사이에 이 도시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 인터넷에서 예쁜 사진 몇 장을 보며 카드결재를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


여행자는 붉은 흙길이나 오래된 돌길을 따라 걸으며 바람 따라 흔들리는 먼지와 집집마다 세워진 원색 깃발의 무게를 느끼는 사이에 문득 이 도시를 사랑하는 첫 마음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뜨거운 태양과 척추 뼈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땀과 길거리를 헤매는 지저분한 개들 때문에 빨리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첫 만남과 첫 느낌이 여행에서 돌아와 가장 또렷하게 떠올리게 될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아이들에게는 낯선 이국의 도시에서 지금부터 만나게 될 수많은 골목과 게스트하우스와 레스토랑과 유적지들 모두가 하나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아이들은 매일 매 순간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여행을 채워갈 것이고, 그 사이에 우리들의 삶도 매 순간을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채워야할 여백이며, 또 그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행복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레에서 여행의 시작


각자의 길을 나섰던 세 개 모둠의 아이들이 모두 한 게스트하우스에 모인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싸고 전망이 좋았으며 친절한 라다크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곳이었으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아직은 홀로서기의 두려움이 어린 여행자들의 품속에서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그날 그렇게 우리들의 여행은 설렘과 두려움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레에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도 없고 도로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교통이 매우 혼잡하다. 시차 때문에 시간이 너무 헷갈리고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빨리 적응이 되어 즐겁게 여행하다 갔으면 좋겠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우현)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풍경들을 감상하며 숙소를 찾아다녔다. 여기에서 여행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레!”하고 반갑게 인사해주는 인상 좋은 마을 사람들과 예쁜 풍경이 보이는 집과 불쑥불쑥 튀어나와 놀라게 하는 야크와 개들. 재밌는 일들이 쏟아질 것만 같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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