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일과 영성》

창조·타락·구속 서사로 읽는 노동 신학

by 이원규
image.png 《팀 켈러의 일과 영성》, 팀 켈러, 2013, 두란노서원

그리스도인에게 일터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신앙이 시험받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정직보다 성과가, 양심보다 성공이 더 크게 요구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일할 수 있을까요? 《팀 켈러의 일과 영성》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려는 책입니다.


저자 팀 켈러는 뉴욕 리디머교회 담임목사로 《살아 있는 신》, 《내가 만든 신》 등 여러 기독교 베스트셀러를 쓴 인물입니다. 그는 리디머교회에서 25년간 목회하며 신앙과 노동의 문제를 다루었고, 2002년에는 신앙과 노동 사역 센터(Center of Faith & Work, CFW)를 세워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훈련해 왔습니다. 그 사역의 한가운데에는 “고섬 펠로우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워싱턴 어빙이 뉴욕시에 붙인 별명에서 온 이름이지만, 독자에게는 배트맨의 고담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명칭은, 세속의 일터가 지닌 어두운 긴장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책은 그런 ‘고담 같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일하고, 버티고, 증언할 것인지를 기독교 전통의 여러 통찰과 함께 정리합니다.




책의 본문은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일, 끝없이 추락하다”,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라는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파트는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는 이 책 전체를 묶는 틀로서 신앙과 일의 통합이라는 주제를 제시합니다. 켈러는 서로 다르거나 때로 상충하는 주장들까지도 맥락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상호 보완적 도구로 보고, 그것들을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독교의 구속 서사 안에서 통합합니다. 따라서 part 1은 창조, part 2는 타락, part 3은 구속에 해당합니다.


또 이 책은 각 장을 일반적인 제목 하나로만 제시하지 않고, 장 번호와 주제, 그리고 메시지형 표제를 나누어 보여 줍니다. 예컨대 1장은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라는 주제 아래 “1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라는 표제로 제시됩니다.




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에서 켈러는 그리스-로마식 이원론과 기독교를 대비시키며 일의 가치를 복권합니다. 그리스-로마적 사고의 한 흐름에서는 노동을 인간을 육체와 물질세계에 묶어 두는 낮은 활동으로 보고, 일하지 않는 사색의 삶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감각은 의외로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일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벌이나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여기고, 천국을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상태로만 상상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하며, 인간 역시 처음부터 피조세계를 돌보고 다스리는 존재로 부름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일은 타락 이후에 억지로 감당하는 짐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참여하는 소명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노동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뿐 아니라 쉼, 곧 안식도 주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노동으로 창조와 섭리에 참여할 뿐 아니라, 안식 안에서 예배를 드리며 삶의 의미를 체득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죽음과 천국에 대한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그리스-로마식 이원론에서는 죽음을 육체의 감옥에서 영혼이 풀려나는 긍정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에서 죽음은 아름다운 해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원수입니다. 또한 구원의 완성을 영혼의 탈출이 아니라 몸의 부활로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물질세계와 인간의 몸, 그리고 그 몸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결국 버려질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지닌 채 구속의 전망 안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영역의 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대리하는 거룩한 행위이며, 그 안에서 귀천이나 성속의 구분이 없습니다. 또 일에서 궁극적인 의미와 정체성을 찾거나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우도록 촉구합니다.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에서는 왜 본래 영광스러운 일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첫째는 허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대신 선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질서가 왜곡되었고, 노동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 타락의 왜곡 아래에 놓여, 고되게 일해도 열매가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소외입니다. 관료주의와 고도의 분업으로 노동의 결과에서 배제되고, 경쟁과 인정 욕구가 의미를 대신하면서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일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탐욕입니다.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탐욕은 경쟁과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넷째는 우상 숭배입니다. 켈러의 말에 따르면 우상은 ‘좋은 것’을 ‘궁극적이고 영원한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일을 궁극적이고 영원한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인을 낙담하게 하며, 사회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궁극적 기준처럼 받들어지면서 여러 병폐를 만들어냅니다.




타락은 세상을 본질적으로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갈라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전 영역을 왜곡하고 오염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교회 안의 일로 옮겨 간다고 해서 타락한 노동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타락의 결과 여성은 분만의 고통을, 남성은 허무한 노동의 고통을 지게 되었고, 여러 언어에서도 산고를 노동과 같은 낱말로 표현합니다. 켈러는 이렇게 허무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온전해진다는 것에서 소망을 찾습니다.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재능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자기 분야에 유익하게 일하는 태도를 제시합니다. 탐욕에서 벗어나는 길로는 일로 불안을 해소하고 우월해지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제시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이 이룬 것에 붙들리지 않는 자세를 소개합니다.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 사역 안에서 이 타락한 일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세계관 방법은 창조, 타락, 구원과 회복의 서사를 일하는 현장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명론은 직업 현장을 하나님의 섭리가 펼쳐지는 곳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세속 영역과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안에 있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기독교인의 직업 윤리는 사랑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에 기초를 두고, 직업 현장의 구조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불편부당함을 드러내며 더 나아가서는 그 구조를 더 선하고 정의롭게 바꾸는 방법을 찾도록 합니다. 복음적인 열정과 쉼은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는 희생에서 비롯하는 열정과, 일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파트에서 켈러는 일관적으로 성속이원론을 비판하기 때문에, 성과 속을 선과 악, 의와 불의로 바로 옮기는 관점과도 대립합니다.




켈러가 프롤로그에서 말했듯, 신학 전통마다 중시하는 바는 다릅니다. 주에서 세계관을 다루는 9장은 개혁교회, 소명론을 다루는 10장은 루터교회, 직업 윤리를 다루는 11장은 주류(메인라인) 에큐메니컬 교회, 복음적 열정과 쉼을 다루는 12장은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의 관점에 가깝다고 밝힙니다. 켈러는 세계관은 블루컬러보다 화이트컬러 직종에 더 유리한 도구며, 공장 노동자나 농부와 같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같은 결과물을 산출하는 직업에서는 소명론이 더 적합할 뿐만 아니라 세계관이 지닌 차별성에 집착할 때 나타나는 엘리트주의를 견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켈러는 각 신학 전통의 차이를 날카롭게 드러내기보다는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틀 안에서 제시합니다.




에필로그에서는 켈러의 목회 현장인 리디머교회에서 실천한 일과 신앙을 하나 되게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일과 영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들의 필요를 다른 교회에서도 돌볼 것을 요청하며 마칩니다. 켈러는 일과 영성 훈련이 NGO의 형태로 되기를 거부하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실천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본문에서는 일반 영역의 일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보며 성속의 구분을 거부하지만, 마약판매상처럼 일 자체가 사람을 해하도록 되어 있는 직업도 있다고 주에서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불법적 직업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담배 회사의 임직원처럼 합법적이면서도 사회에 적잖은 해를 끼치는 직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켈러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 대신, 금융회사에 다니며 사회에는 해를 끼치지만 회사에는 이익이 되는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의 사례를 듭니다. 그는 그 프로젝트를 막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수주는 하되 그 성과로 나오는 보너스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사례는 적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는 태도, 곧 탐욕을 절제하려는 자세는 보여 주지만, 구조적 해악이 섞인 일에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 원칙까지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이 예에서처럼, 각 장마다 직업 현장에서 크리스천들이 겪는 갈등과 문제를 사례로 제시합니다. 이런 예들은 현실의 난제를 시원하게 해결하는 실천 매뉴얼은 아니지만, 독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분별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단서는 제공합니다. 고객에게 고가의 인테리어를 권해 수수료로 부유해졌다가 내적 갈등 끝에 직업을 바꾼 실내 장식 회사 경영자의 사례도, 하나의 답만이 아니라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이 예들의 장점과 한계는 분명합니다. 양적으로는 풍부하지만, ‘고담 시티’를 섬기는 리디머교회의 사역에서 나온 만큼 도시의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경영자들의 갈등에 상대적으로 편중되어 있습니다. 그 맥락 안에 있는 독자에게는 생생한 통찰이 되지만, 다른 노동 환경에 놓인 독자에게는 자신의 삶으로 곧바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수한 사례로 남기도 합니다. 더욱이 합법적이지만 구조적 해악이 섞인 직업처럼 실천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예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따라 볼 만한 수준의 구체적 논의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켈러는 우상의 문제를 다룰 때 현대 사회를 셋으로 쪼개어 전방위적으로 비판합니다. 그 셋은 전통에서 비롯하는 우상, 모더니즘에서 비롯하는 우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하는 우상입니다. 모든 영역이 다 선하며 다 타락했다는 관점을 충실히 따라, 셋 모두 자기만의 우상으로 사람들을 압제하고 소외한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면, 전통은 위계 질서를, 모더니즘은 과학주의·합리주의·능력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기술 관료주의와 소비만능주의를 우상으로 만듭니다. 비슷한 과학주의와 과학기술 관료주의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른 주의에서 비롯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더 파고들어 보면 과학주의는 이성과 합리를 궁극적 가치로 두는 데서 비롯하고, 과학기술 관료주의는 직접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것을 해체한 자리에 기술이 돈과 함께 사회 공통의 언어로 끈질기게 남는 데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켈러는 일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되는 것 역시 일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으로 여기며, 직업으로 교회와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복음주의적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책은 풍부한 예를 제시하고 종합적인 방법론을 안내하기 때문에 일단은 친절하게 일과 영성의 문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의를 더 깊이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을 급진적인 좁은 길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part 3는 실제 현장에서 사용해야 하는 방법론을 다루기 때문에, 여러 직업 영역마다 설명하는 도구가 쓰이는 형태를 다양하게 제시합니다. 그 중 하나가 저널리즘입니다. 켈러는 복음적 세계관에 따르면 자기 편과 다른 편을 나누는 정파적인 보도와 다른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만물이 선하게 창조되었고 만물이 고루 타락했다는 창조-타락 서사와 연결됩니다. 만물이 고루 타락했으므로 자기 편은 절대 의롭고 상대 편은 절대 불의하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복음적 세계관에 기대어, 예술에서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위계를 거부합니다. 일반 은총은 이와 같은 관점을 더욱 강화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크리스천 밖의 세계에도 있으며, 크리스천 밖의 세계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모인 곳에 진리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적지 않은 기독교 저널리즘이 교회를 진리의 진영, 세속을 허위의 진영처럼 묘사해 온 관행과 비교하면 상당히 급진적입니다. 현실에서도 이런 종파적 저널리즘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켈러의 논리에 따르면, 교회 안에도 거짓과 오류가 있고 교회 밖에도 일반 은총의 빛이 남아 있으므로, 교회를 곧바로 선의 진영으로, 세속을 곧바로 악의 진영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견이 됩니다. 이것은 진리와 거짓의 분별 자체를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 분별을 자기 편과 상대 편의 구도로 손쉽게 대체하지 말자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저널리즘의 과제는 자기 진영을 두호하고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데 있지 않고, 사실 검증과 자기 비판을 통해 누구도 순수하게 의롭지 않으며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데 있게 됩니다.


이 저널리즘의 논리를 정치에도 확장하면, 어떤 기독교 정당도 자신의 정체성만으로 곧바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다고 주장할 수 없고, 어떤 크리스천 정치가도 자신의 신앙만으로 이미 공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정치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여가 종교적 자기선언이 아니라 공적 책임과 검증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크리스천 정치가는 기독교 정체성에 기대어 지지를 호소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모두 공정하게 대하며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음을 정책과 절차, 절제와 능숙함을 통해 증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정치에서 면허증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한 책임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만물이 고루 타락했으며 하나님이 크리스천 아닌 사람에게도 일반 은총을 내리신다는 전제를 밀고 나갈 때, 켈러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복음주의 문화 금욕주의와는 다른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을 폅니다. 그는 크리스천 문화만을 안전한 영역으로 여기고 대중문화를 멀리하는 태도 역시, 켈러의 표현을 가져오면 '점잖음'을 경건의 표지처럼 여기는 또 다른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중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아니라, 그 안에 섞여 있는 일반 은총과 왜곡을 함께 식별하는 겸손하면서도 비판적인 향유입니다. 이 관점은 왜 크리스천 아닌 사람들이 예술적으로 탁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남습니다. 기독교와 일부 공명하면서도 동시에 충돌하는 작품, 곧 인간과 사랑과 정의에 대한 통찰은 담고 있으되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구원관을 함께 내포한 대중문화를 실제로 어떻게 감상하고 비판하며 부분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켈러가 제시하는 예는 지나치게 투명하게 기독교적 가치와 공명하는 작품이어서, 가장 까다로운 회색지대에서 독자가 따라 볼 만한 분별의 시범으로는 다소 부족합니다.


이 논리를 더 밀고 나가면, 문제는 대중문화만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만 향유하는 태도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기독교 음악만 듣더라도 그 내용이 특정한 형태의 하나님 사랑만 반복하고 공의, 이웃 사랑, 고난, 희생 같은 주제를 지워 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편향된 이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기독교 문화와 대중문화를 기계적으로 갈라놓는 일이 아니라, 어느 문화 형식이든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상상력을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하나님 편과 사탄 편,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독자들에게 매번 더 어렵고 피곤한 분별을 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 과정에서 분별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의 존재는 말해 주지만, 그 회색지대 안에서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더 자세한 예나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의 신학적 위치를 살펴 보면, 영미 복음주의 진영에서 비롯한 책이지만 이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여러 신학적 견해를 통합하려는 시도뿐 아니라, 세부 주석과 사례 선택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컨대 주석에서는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는 전통 견해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책 전체에서 끝까지 솔로몬 대신 ‘코헬레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켈러가 성서비평학의 결론을 전면 배척하기보다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 아나뱁티스트 역시 성속이원론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함으로써, 개신교 내부 전통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적 경향은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에큐메니컬 주류 교회의 관점을 다루는 11장에서도, 상사가 신입 직원의 잘못을 대신 떠안음으로써 그 직원이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도 리디머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는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 사례는 직업윤리의 예로 배치되어 있지만, 타인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예수를 증언했다는 서사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복음주의적 감각에 더 가깝습니다. 12장이 복음적 열정과 쉼을 따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사례가 11장에 놓였을 뿐, 켈러의 통합은 이렇게 에큐메니컬한 직업윤리와 복음주의적 증언의 언어가 겹쳐지는 방식으로도 드러납니다.




노동은 인류가 에덴에서 쫓겨나 벌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대리하는 것, 그리고 노동의 고통은 타락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그리스적 세계관에 익숙해 노동을 족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일이 저주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기독교에서 일을 해석하는 관점을 구원 서사라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은 이 책의 강점입니다. 일에서 소외되고 허무를 겪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적용에서는 도시의 경영자와 노동자에게 더 친절하게 다가오는 책이고, 도시 밖의 일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영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모든 영역이 고루 타락했으므로 기독교 정체성에 현혹되지 말고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독자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기며, 언론과 정치 등의 영역에서 피아를 분명하게 가르려 하는 욕망과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크리스천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복음 안에서 폭넓게 살펴, 타락한 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려 주고 동참하게 합니다. 이 책은 몇몇 적용의 공백과 사례의 편중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부담까지 감수하게 만들 만큼, 일과 소명을 복음 안에서 진지하게 다룬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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