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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Jul 02. 2024

어조사 의(矣)에서 파생된 한자들

기다림, 티끌, 한숨 등 - '진행하던 것이 멈추다'

지난 시간에 다룬 이미 이(已)에서 파생된 한자들 중에서 미처 다루지 못하고 빠진 글자가 있다. 바로 어조사 의(矣)다. 이 글자는 厶(사사 사)+矢(화살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厶는 已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글자다.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를 문장을 끝내는 용도의 어조사로 풀이하고, 厶 대신 以(써 이)를 써서, 以가 소리를 나타내고 矢가 뜻을 나타내는 형성자로 분석했다.


矣는 갑골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전국시대의 금문에 처음 나타난다. 바로 지금의 허베이성 중부에 있던 옛 나라 중산(中山)의 유물인, 중산왕정(中山王鼎)에 새겨진 명문에서 발견되었다. 중산은 전국시대의 주요 7웅에 끼지는 못하지만, 한족의 나라가 아닌 백적(白狄)의 나라로서 제 나름 이름을 남겼다.

초기 전국시대 지도. Zhao(조) 옆의 Zhongshan이 중산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금의 허베이성 스자좡시 링수현이 중산국의 옛 서울인 영수(靈壽)로,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링수현 인근의 핑산현 산싼지향에서 찾은 중산왕묘를 1974년과 1977년에 걸쳐 발굴해 수많은 중산의 유물이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중산왕정이다. 이 중산왕정은 중산왕 착이 부어 만든 정(鼎), 곧 중국의 고대 청동 솥의 일종을 말한다.


이 정이란 솥은 귀가 둘 달리고 발이 셋 달려 있어서, 세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형세를 정의 세 발에 따와서 정립(鼎立)이라고 한다. 삼국정립이 이에서 나온 말이다. 중산왕정은 몸체는 청동으로 발은 철로 되어 있으며, 머리에는 환뉴, 곧 고리 손잡이 셋이 붙어 있다. 높이는 51.5 cm, 지름은 65.8 cm다. 고리 손잡이와 발 사이에 77행 46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산왕정. 출처: 바이두백과

이 중산왕정에 새긴 명문의 주인공인 중산왕 착은 중산의 군주 중에서는 최초로 왕을 일컬었고, 중산을 강국으로 만들어 전국시대의 주요 국가로 나란히 서게 한 인물이다. 이 중산왕 착은 자신의 이름자로도 한자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현대 해서체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중산왕 착. 마지막 착 글자가 특이하게 생겼다. 이 글자는 昔(옛 석)이 음을 나타내는 형성자고, 그 윗부분에 붙은 부분은 복잡하게 생겼는데 상용 한자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한자를 찾는다면 釁(피바를 흔)의 윗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하던 이야기는 矣(어조사 의) 이야기이니 이 한자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다음 그림은 중산왕정에 새겨진 명문을 뜬 탁본의 처음 부분이다.

중산왕정에 새긴 명문의 탁본. 출처: 바이두백과

당대 한자의 형태인 전서와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서를 조금 알아도 어느 정도는 해독이 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다행히도 위키문헌에 중산왕정 명문이 이미 올라와 있기 때문에 일일이 탁본을 해독하지 않아도 된다.

위의 탁본에 해당하는 위키문헌 중산왕정 명문.

이 중산왕정에 矣의 금문이 나온다. 탁본에서는 왼쪽에서 두 번째 줄, 맨 아래에 나온다. 명문 탁본에서는 회색 사각형으로, 위키문헌 명문에서는 진한 글꼴로 강조해두었다.


이 중산정왕 명문의 矣자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이렇게 생겼다.


이 글자는 설문해자에 나와 있는 矣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矢 위에 있는 부분이 已와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서 叫(부르짖을 규)의 오른쪽 부분에 더 가깝다. 그러면 矣는 已와는 상관없는 글자일까.


하림의 교수는 이것은 已의 착오라고 주장했으니, 설문해자의 분석이 옳다고 해준 셈이다. 중산왕정에 남아 있는 이 矣의 기능이 지금의 矣의 기능인 문장을 종결하는 기능므로, 기존의 矣와 별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한편 중산왕정의 矣 외에 다른 죽간 등에 남은 矣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곽점초간 등의 출토문헌 간독에 쓴 矣. 출처: 國學大師

이를 보면 중산왕정의 矣가 예외적이고 대부분은 설문해자의 분석처럼 已와 矢가 합한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矣의 옛 글자로 옥편에 수록되어 있는 아래의 글자도 어쩌면 已를 匕로 잘못 보고 쓴 게 아닐까 싶다.


已나 以는 지금의 의미로는 '그치다'나 '써'이지만, 상형자로서는 아마도 태아가 출생하는 장면을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矣는 출생하는 태아와 화살을 같이 그린 것이 된다.


이렇게 상상해 보니 돌잔치 때 아기가 화살을 집어드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기에게 화살을 쏘는 섬뜩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무기로 해치는 글자는 인신공양이 횡행하는 갑골문 시절에 주로 나오는 것이니 전국시대 후기에야 나오는 矣가 그런 의미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면 아기가 화살을 집어드는 모습이려나?


矣는 어조사로서 문장을 끝맺는 기능, 그리고 화자의 의지를 담은 단정 완료, 미래, 감탄, 명령 등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已에는 그치다, 마치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화살(矢)이 한 지점에 멈추는(已) 것처럼 문장을 마치고, 화살이 멈추는 것처럼 의미를 한정하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다룬 已의 파생자들은 已에서 태아라는 뜻을 가져왔는데, 矣에서는 已가 '그치다'로 쓰이고 있다.


矣(어조사 의, 만사휴의萬事休矣·여의도汝矣島 등, 어문회 3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도 급수에는 없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오는 한자가 끼어 있다.


矣+人=俟(기다릴 사): 사명(俟命), 상사(相俟) 등. 어문회 준특급

矣+土=埃(티끌 애): 애급(埃及), 속애(俗埃) 등. 어문회 2급

矣+欠=欸(한숨쉴 애): 애내(欸乃), 애내곡(欸乃曲) 등. 급수 외 한자

矣+水=涘(물가 사): 수사(水涘), 애사(涯涘) 등. 어문회 특급


이처럼 矣에서 파생된 글자 중에 음이 '사'인 한자가 있다는 것은 矣의 소리가 已에서 나왔다는 간접 증거이기도 하다. 已 역시 파생된 한자에서 似(같을 사)처럼 음이 '사'인 한자가 있기 때문이다.

矣(어조사 의)에서 파생된 한자들.

俟는 화살이 멈추듯 사람이 멈추고 기다리는 것, 欸는 화살이 멈추듯 숨을 내쉬고 멈추는 것, 涘는 물이 멈추고 더 올라오지 못하는 곳 곧 물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갈다. 이를 보아 矣는 소리로 쓰일 뿐만 아니라, 진행하던 것이 멈춘다는 의미를 파생된 한자들에 남기는 것 같다.


이 중 欸(한숨 쉴 애)는 중국의 통용규범한자표에도 이급자로 나올 만큼 중국에서는 종종 쓰이는 한자로, 중국의 한어병음방안에 특이한 규정을 남기는 한자이기도 하다. 한어병음방안 말고 중국어의 소리를 나타내는 표기인 주음부호는 대략 초성 자음에 해당하는 성모와 나머지에 해당하는 운모로 분리해서 표기하는데, 이 중에 ㄝ라는 운모용 글자가 있다. 한국어로는 '에'와 구분되는 '애' 모음에 해당하는 소리로, 대부분 다른 운모와 같이 쓰이지만 감탄사에서는 단독으로 쓰일 때가 있다. 欸가 바로 그 감탄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한어병음에서 이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은 e인데, 다른 모음 글자와 결합해야 그 기능을 하고 결합하지 않으면 '으' 발음이 된다. 따라서 欸의 발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e 위에 ^를 추가해 ê로 쓰고 여기에 성조 기호를 덧붙여 ê̄, ế, ê̌, ề 등으로 나타낸다.


矣는 矢(화살 시)와 已(그칠 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살이 멈추는 것처럼 문장을 끝내는 기능을 한다.

矣의 옛 형태는 중산왕정에서 처음 발굴되었으며 已 대신 叫(부르짖을 규)의 오른편을 썼으나, 대부분의 출토문헌에서는 지금의 형태로 썼다.  

矣에서 俟(기다릴 사)·埃(티끌 애)·欸(한숨쉴 애)·涘(물가 사) 등이 파생되었으며, 矣는 이런 글자들에서 진행하던 것이 멈춘다는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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