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주제에 따라 짤막한 생각을 쓰는 글쓰기를 틈날 때마다 하고 있다.
어제의 질문은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은?'이었다.
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사랑해’라는 말이야. 그건 엄마가 맨날 해주는데 하나도 안 질려.
아이의 언어는 이렇듯 무심하게 가슴을 데운다. 실제로 나는 '사랑해'라는 말이 헤픈 편이다. 야단을 쳐놓고도 금방 끌어안으며 그래도 사랑은 한다고. 그래도 혼날 땐 혼나야 하는 거라고. 그래도 내가 너 정말 사랑하는 거 잊으면 안 된다고. 아이의 마음이 너무 깊게 파이진 않았는지 확인하곤 한다.
그것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너무 멀리 떠밀려 나와 괴로웠던 내가 나의 딸을 또 그런 식으로 멀리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때로는 이토록 깊고, 복잡한 마음을 꼬맹이가 알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어린것이 내 속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또 내가 해줬으면 해 줬지 알아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넌 참 치사하다 하면서.
근데 아이가 적은 서툴고 짧은 문장에 나는 마음이 녹는다. 알고 있었구나. 내 사랑이 네게도 좋았구나.
혼나고도 기꺼이 파고들 수 있는 내 품이 너도 따뜻했구나.
순간 내가 정말로 기쁘고 자랑스러웠던 건, 내가 듣지 못한 채 자랐던 말을 아이에게 양껏 들려주며 키우고 있다는 사실.
보거나 느껴본 적 없어서 상상만 하던 사랑을, 지금은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 그게 나를 살리고 있다.
그러니 니 녀석은 내 인생의 구원자가 아니면 뭘까.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는 사랑받아본 적 없어서 잘 몰라요.'라고 말하는 마음을 알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모두가 침몰한다.
우리는 받아본 적 없지만 바라던 사랑과 아름다움은 분명 있다.
그것을 실천하는 쪽으로 살아내야만 한다.
내게 상처 준 이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증명해내야만 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실은 얼마나 달고 따스운지..
또 새삼 느꼈다.
아이는 나를 가난하게 하거나 망하게 두지 않는다. 아이는 나를 성장시키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볼 기회를 준다.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지만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 또한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