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메모리>를 통해 바라본 칠레 민주화 역사의 페이지
영화 <이터널메모리>는 한국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으로, 칠레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두 인물의 사랑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기자이자 작가로 칠레의 민주화에 공헌한 남편 아우구스토 공고라. 배우이자 활동가이며 문민정부 시절 문화부 장관까지 역임한 아내 파울리나 우루티아.
20년을 연애하고, 결혼에 이르지만 남편, 공고라는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에 걸리게 된다. 알츠하이머는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무서운 질환이다. 차곡차곡 쌓아둔 소중한 기억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버린다. 사랑스러운 아내, 귀여운 자식들, 존경하는 부모님, 소중한 동료들, 그리고 평생을 투쟁해 왔던 칠레 민주화의 순간들마저 모조리 빼앗아가버린다. 아내, 우루티아의 헌신에 웃음을 잃지 않고 용감하게 알츠하이머에 맞서 싸우던 공고라도 크게 좌절하는 장면이 있다. 인지기능에 혼란이 생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겨우 책 몇 권을 손에 쥐고 이렇게 외친다. “책은 내 전부야, 절대로 줄 수 없어!”. 하지만, 그는 책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자신의 기억이 훼손된다. 그 기억의 일부 중 하나는 ‘칠레의 군부 독재라는 암흑기를 거쳐 다시금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였다는 승리의 역사’다. 그 순간을 위해 공고라는 평생을 힘써왔고, 이뤄냈다. 그런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기억의 흔적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글의 맨 후반부에 영화 <이터널메모리>의 감상평을 마저 적어보는 것으로 하고, 공고라가 싸워온 기억의 토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칠레 역사의 장면들이 공고라의 시선을 통해 스쳐 지나간다.
공고라의 이터널메모리 중 하나, 그것은 바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 직전, 짧은 시간이었지만 희망을 보여주었던 인민연합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시절(1970~1973)이다.
1973년, 9월 11일. 이 날은 칠레의 암흑기가 시작된 날로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청와대(혹은 용산 대통령실)와 같은 대통령 관저, 모네다 궁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로부터 폭격을 받는데 이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바로, 당시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eende, 1908~1973)이다. 아옌데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하다. 그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통해 선출된 사회주의 정부의 지도자이다.
1970년대 전후의 칠레는 구리 생산을 통해 상당한 돈을 벌어 들이는 경제중진국으로, 어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높은 GDP 및 국민소득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처참했는데, 부의 대다수를 소수의 부유층이 점유하고 있는데다(단, 2000명만이 전국 자본의 87%를 소유) 소득격차도 극심했다. 게다가, 칠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구리 광산 역시 대부분 서방의 다국적 기업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량과 별개로 구리로 인해 발생되는 부가 칠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시, 칠레인들의 평균 수명이 37세를 넘기지 못했다는 것도 암담했던 칠레의 경제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런 칠레 사회를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행보를 통해 바꾸려고 노력했던 지도자였다. 1970년, 인민연합 대표로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는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한다. 공교육 제도 개편, 남녀 동일임금 도입, 어린이 대상 무상급식 실시, 사회보험 적용 대상 확대 등이 있다. 그리고, 칠레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구리 (이외에도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등의 원자재부터 금융, 무역 등의 분야) 광산과 사유지의 25%를 국유화하는 토지 개혁을 단행한다. 이로써 고소득층과 다국적 기업에만 몰리던 부가 분배되면서 연평균 국민총생산(GNP)이 8% 이상 높아지고, 실업률을 8.3%에서 4.8%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한다. 칠레 정치에서 집권당이 임기 중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인민연합 정부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책들은 칠레의 기득권층 보수 세력과 미국을 자극하고 만다. 1970년대는 냉전이 극대화로 치닫던 시절로, 전 세계가 두 개의 이념을 두고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던 때다. 자본주의를 위시한 미국은 '메카시즘'을 토대로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계하고, 자본과 정보력을 통해 총알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쿠바 피그만 침공사건(1961), 베트남 전쟁 참전 (1962), 도미니카 산토도밍고 침공(1965)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비록 민주적인 절차로 집권했지만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개혁을 단행하는 칠레의 아옌데 정부 역시 미국의 눈엣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하물며,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 광산의 다국적 기업의 상당수가 미국의 소유였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자본 및 정보력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 정부의 쿠데타를 사주한다는 것은 소설상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지만 냉전의 역사는 소설보다도 더 가혹하다. 미국은 아옌데의 국유화 정책에 대항하듯, 칠레의 정치와 경제를 규제하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어, 칠레의 구리 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비축한 구리를 대량으로 방출하여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으며, 칠레의 신문사 중 하나를 매수하여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 방송을 쏟아내게 만들어 내는 등 '선동'을 일삼는다. 도시 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했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 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한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아옌데는 명분과 실리를 점차 잃기 시작한다. 물가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지지율은 점차 떨어져 칠레사회가 점점 분열되어 가는 모습을 막지 못한다.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빼앗은 미국은 이제 방아쇠를 한발 더 당겨 아예 아옌데 정권의 '몰락'을 시행한다.
여기서, 공고라의 이터널 메모리 둘.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과, 백악관 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아옌데가 집권 첫해인 1970년부터 CIA를 통해 칠레 군부의 쿠데타 준비를 착실히 준비했다.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고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정책'
(헨리 키신저가 칠레 CIA 지부장에 전달한 비밀전문)
미국에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에 의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그날, 그날로부터 정확히 28년 전,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명령으로 칠레의 군인들이 대통령 관저 모네다 궁을 폭격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bnochet, 1915~2006)는 칠레의 상류층, 군부, 외국 다국적 기업, 그리고 미국의 지원 아래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다.
공군 전투기를 동원해 대통령궁에 폭탄이 떨어졌고, 적들로부터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아옌데는 총으로 스스로 머리를 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민주적인 절차로 세워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지 만 3년 만의 일이다. 이후 어느 독재자들이 늘 그렇듯, 칠레의 사회와 경제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으로 피노체트는 숱한 인권 탄압을 저지르며 독재 정권을 이어간다. 17년의 집권 동안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권 침해를 겪고, 3천여 명이 강제실종되거나 살해당한다. 3만 8천 명의 인원은 불법구금되고 고문을 받았다.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던 그날, 칠레 주 경기장에서 군인들은 수 천명의 대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을 끌고 와 고문을 하고 살해한다. 여기에는 칠레의 전설적 민요가수이자 민중 문화운동가인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2~1973),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같은 인민연합에서 아옌데와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정치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도 포함되어 있다.
아우구스토 공고라는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칠레가 처한 현실을 알리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펜을 들었던 언론인이다. 언론탄압이 '당연시' 되던 시절에도 피노체트 정권이 민주주의-사회주의 인사들이 탄압당하는 현실을 칠레 민중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가 펴낸 저서 <금지된 기억>은 고통과 공포가 가득하지만 칠레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용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칠레는 익숙한 국가는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를 돌이켜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아옌데 정권이 독재자 피노체트에 의해 무너졌던 것처럼, 박정희 사후 최규하 과도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12·12 사태가 발생한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의 집권이다. 피노체트와 전두환은 잔혹한 독재자로 불리지만, 보수세력들로부터 경제발전을 이끈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이러한 평가는 현재까지 이어져 칠레사회를 분열로 치닫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함에도 이를 사실대로 언론에 싣지 못하던 현실, 아우구스토 공고라가 <금지된 기억>을 통해 칠레가 처한 현실을 널리 알렸다면 한국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써냈던 사직서가 떠오른다.
오늘까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기자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 사직서는 검열을 통해 정부 발표만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신문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 양심'이라는 생각으로 써 내려간 문장이라고 한다.
공고라의 이터널메모리 셋.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퇴행성 알츠하이머를 겪고 있는 그에게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 있다. 피노체트의 고문에 의해 죽어간 동료 언론인들의 모습이다. 그는 친구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 아내의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가장 슬프고 비참한 기억은 잊히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하지만, 역사는 '괴롭고 슬픈'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그 기억을 보존해두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공고라는 독재정권 시절, 자신이 직접 겪은 수난과 성찰을 기반으로 써 내려간 <금지된 기억>의 저자이다. 검열과 탄압이 '당연시' 되는 기조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는 기억 투쟁이 필수적이다. 기억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 어떤 왜곡된 진실이 덧입혀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동반자 파울리나에게 자신의 저서 <금지된 기억>을 선물하면서 맨 앞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엔 고통과 공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귀함도 있지요. 여전히 금지된 기억이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세상엔 고집세고 완고한 사람들이 있어요. 기억하려는 이들, 용기 있는 사람들, 파울리나 당신처럼 씨를 뿌리는 이들이오. 당신은 기억하려 하고 용기가 있고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칠레사회는 피노체트 정권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잊지 않고 있다. 2006년 심부전으로 사망하면서 사법적 단죄는 면했으나, 민중들 스스로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던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할 일은 남았다. 피노체트 정권 당시, 부역했던 인사들을 완전히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독재자의 신념을 이어받은 우파 정당들이 낮지 않은 지지율과 민중과 언론을 탄압한 역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끊임없이 기억하기에,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잊지 않기에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금지'된 기억이 아닌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 그 기억들이 사회에 뿌리내려 다시 한번 더 변화를 이끌어 내리라 확신한다.
영원한 기억의 중요성을 심어준 아우구스토 공고라와 파울리나 우루티아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영화 <이터널메모리>에 대한 감상평을 마쳐보고자 한다.
출처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2016.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김상목, 50년 전 칠레의 '9.11' 사건, 이 영화가 던진 화두, 오마이뉴스. 23. 09. 21.
낮달, 1973년 9월,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 무너지다, ㅍㅍㅅㅅ. 17. 09. 23.
암네스티, 독재자 피노체트 치하의 삶 : 우리의자유를 묻던 날. 13. 11. 18.
영화. 이터널메모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