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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무너진 매킬로이의 무릎

국적·커리어·미디어가 만든 2025년 최고의 서사

by 휠로그

되돌아보는 2025년의 필드. 세계 골프 팬들의 머리와 가슴에 길이 남을 순간은 단연 로리 매킬로이(Rory Mcilroy)의 마스터즈(Masters) 토너먼트 우승과 커리어 그랜드 슬램 소식이다.



오거스타를 울린 한 장면


오렌지색 햇살이 그린에 불청객처럼 길게 드러누웠다. 그린을 둘러싼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그린 위의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몸통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오열하고 있었다. 오거스타 내셔널의 그린 전체가 제의에 빠져든 순간 같았다. 남자는 로리 매킬로이였다.


GettyImages-2210126583_2025-04-13-233113_ibfg~W1500_H843_Mcrop_P50-50.jpg 2025년 마스터즈에서 첫 우승, 타이거 우즈 제외 현역 최다 우승,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기록을 쓴 로리 매킬로이(출처, 테일러메이드, 게티)


중계 장면에 잡힌 로리 매킬로이의 표정은, 우승의 감격보다도 ‘이게 왜, 이제야’라는 울분이 보였다. 마스터즈의 그린 재킷만 있다면 통산 그랜드슬램이 가능했지만, 마스터즈의 그린재킷만이 높고 먼 곳에 있었다.



결정적 장면, 15번 홀의 하이드로우


이번에도 매킬로이는 우승을 놓칠 뻔했다. 4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애매한 거리의 파 퍼트를 놓친 것이었다. 라이가 나쁘지 않았던 벙커 샷이 다소 짧았던 게 화근이었다. 11언더파가 되며 2위의 저스틴 로즈(Justin Ross)와 동타가 됐기 때문이다. 저스틴 로즈 또한 마스터즈에서 준우승만 기록 중이었으니, 그에게도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만약에, 매킬로이가 로즈와의 연장전에서 올해의 마스터즈조차 놓쳤다면 가장 아까웠을 장면이 있다. 바로, 15번 홀에서 7번 아이언으로 하늘에 그린 반쪽짜리 하트와 이에 힘입은 역전 이글이었다. 2019년에도 바로 그 홀에서 비슷한 샷을 보여 준 선수가 있었고, 그 선수의 이름은 타이거 우즈였다. 타이거 우즈는 234미터짜리 5번 아이언 샷이었고 로리는 191미터짜리 7번 아이언 샷이라는 게 약간 다른 점이었다. 샷 후 왼쪽으로 걸어 나가면서 제발, 제발 하며 소리치는 장면도 타이거의 그 장면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받은 '호랑이 기운'이 오히려 주화입마가 됐던 것인지, 마지막 홀에 이어가지 못하고 한 타를 잃고 말았다. 오거스타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로리의 어깨를 누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킬로이의 그랜드슬램에 붙은 각주


사실 다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스터즈 타이틀만을 갖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들도 많다. 위대한 이름으로 기억되는 리 트레비노라든가 2000년대의 데이비드 듀발 등도 그러한 선수들 중의 하나다. 또한 커리어 그랜드 슬램도 1935년, 진 사라센 이후, 매킬로이가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 단 6명(진 사라센, 벤 호건,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이었다. 아널드 파머조차도 여기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파머는 마스터즈만 4회나 우승했다. 이런데도 왜 매킬로이의 그랜드슬램이 지금 달성된 것이 그토록 애달프게 받아들여질까?


GettyImages-2148328322~H900_Mcrop_P50-50.jpg 로리 매킬로이 (출처, 테일러메이드, 게티)


우선 그의 통산 승수다. 그는 마스터즈 우승 직전 그는 타이거 우즈를 제외하고, 현역 선수 기준 통산 승수 공동 1위였다. 올해 마스터즈 우승은 오랜 비원을 푸는 의미 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셈이다.


국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랜드슬래머 6인 중 게리 플레이어(남아프리카공화국)를 제외하고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매킬로이는 북아일랜드 국적이다. 미국이나 남아공과는 달리 골프 종주국인 잉글랜드와 약간의 골이 있는 나라다. 디 오픈에서 매킬로이를 응원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신경전이 거의 축구 훌리건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이에 기인한다. 즉 매킬로이의 스타성에 비극적 영웅의 서사도 담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확대한 ‘완벽한 스윙’의 힘


여기에 현재 골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도 한몫한다. 시즌 중이 아닐 때도 선수들의 영상은 재생산돼 공유되고 있다. 또한 각종 중계 기술의 발달을 통해 골프의 다이내믹한 면을 더욱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크다. 이는 야구의 인기와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기에는 고속 드론 기술과 트랙맨 등 타구 방향 분석 시스템이 소프트웨어적으로 결합된다면 중계의 신기원과 인기 상승에 더욱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Rory-McIlroy-Qi10-Driver-Wells-FargoW1500_H844_Mcrop_P50-50_2024-05-13-081053_csuv~W1500_H844_Mcrop_P50-50.jpg 로리 매킬로이의 피니쉬(출처, 테일러메이드, 게티)


이 부분에서 부연해 보자면 매킬로이를 상징하는 완벽한 스윙 시퀀스는 지금과 같은 미디어 형태에 가장 매력적인 요소다. 달리 AI로 구현해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법한 이상적인 모션을 갖고 있다. 어느 프레임에서 멈춰도 매력적이다. 토미 플릿우드나 브라이슨 드섐보, 매튜 울프는 개성 강하고 뛰어나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이 시대의 골프 콘텐츠 소비자들은, 이상화된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 이는 인간 미의식의 보편적인 발로다. 로리는 거기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선수다. 선수를 넘어 베스트 씬의 메이커다.


그는 말 한마디마저 품위 있다. 어린 톰 김(김주형)이 자신에게 플레이의 비결을 묻자 “이미 당신은, 그 나이에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을 해냈다”라며 품위 있게 루키를 칭찬했다. 그런 한편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연습에 집중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본질이 무엇인지 놓치면 안 된다. 지금 당신의 옷에 붙어 있는 로고가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전했다. 빠르게 스타 반열에 오른 선수들이 스폰서의 행사에 불려 다니다가 연습에 해이해지고 기량을 잃는 경우를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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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마지막 달이 며칠 남지 않았다. 주요 골프 매체와 채널들은 앞다투어 올해 결산을 올릴 것인데, 그중 단연 최고의 주제는, 그린 재킷을 입고야 만 로리 매킬로이 이야기일 것 같아서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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