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하는 마음은 항상 나의 추억으로부터 나왔다. 추억 속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휴대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두꺼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만화를 기다리던 초등학생이 있었다. 학교에서 옥상 다음으로 높은 작은 밴드부실에서 친구와 캐논을 연주하던 중학생이 있었다. 추억 속에는 나의 시야가 있었고, 또한 지금의 내 눈에 비친 그때의 내 모습이, 언제까지고 어린 내 모습이 보였다.
잠을 자지 않는 새벽에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의 역사를 쭉 넘기다가 여러 책갈피 중 그때 끌리는 것을 뽑았다. 새벽에는 어떤 새로운 얘기도 안까지 닿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고 어딘가 위태로웠다. 그렇기에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찾았다. 친숙한, 그러나 여전히 사랑스러운, 소중해서 사라질까 봐 두렵기까지 한.
나는 투니버스 애청자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스마트폰이 있는 애들이 드물었다. 다들 스마트폰이 아니라 신발주머니를 들었다. 왼손에 신발주머니를 들었다면, 나의 오른손은 태권도 도복 가방이나 피아노 학원에서 받은 쿠폰으로 채워지곤 했다. 나는 슬러시 맛을 신중하게 골랐고, 신발주머니를 통통 튀기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손만 씻고 텔레비전을 켰다. 내 머릿속에는 나만의 편성표가 만들어져 있었고, 언제 발견할지 모르는 새로운 만화를 위한 자리도 마련해 두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두근거림을 간직한 채였다.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그때 봤던 만화들을 다시 봤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자신들이 나의 추억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화 속의 인물들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웃어 주었다. 그럴 때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제법 기쁘기도 했다. 내 삶에서 처음 겪어 본 십 년이라는 시간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기쁘고 울먹거릴 수 있는 사람으로. 정말로 그랬다. 아이엠스타 노래를 들으면, 열두 살일 때 저금통을 깨서 중고로 산 미르모 퐁퐁퐁 원작 만화책을 꺼내면, 꿈빛 파티시엘에서 나오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디저트를 보면, 설명할 길 없는 잔잔한 반짝임이 전해져 왔다. 그럴 때는 이유도, 논리도, 의미도 다 필요 없어졌다.
그래도 그 이유를 추적해 보았다. 마음의 문을 열고, 기억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추억을 꺼내 보았다. 그러면 어느 페이지건, 책갈피 속에도 내가 있었다. 항상 나의 모습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오프닝 곡을 흥얼거리던 내가, 텔레비전을 켜고서야 최애 만화가 결방하는 걸 알고 펑펑 울던 내가, 원작 만화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걸 중고로 사기 위해 저금통을 깨고, 돈이 모자라서 부모님을 졸랐던 귀여운 내가 있었다. 언제 꺼내어 봐도 언제라도 어릴 나였다. 어리고, 사랑스럽고, 동경하는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마냥 즐거워했고 토라지고 진하게 울고 웃었던 초등학생 나를 바라보는 고등학생인 지금의 내가 있었다. 의의나, 가치나, 논리나, 합리성 같은 걸 달달 외운 내가 있었다. 똑똑해지고 키도 몸도 자라고 여전히 상상을 많이 하고 예전과 다르게 양파는 잘 먹지만 청국장은 안 먹게 된 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먼저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산문 쓰기 같은 걸 하면 진지하게 글을 썼다. 대개는 상을 타지 못했고 어른인 척하는 글이었다. 나는 어른인 척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설렘을 느꼈다. 마음과 머리가 좀 따로 놀았다. 생각해 보면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가 속상한 적도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만 들리는 집이 쓸쓸해서 혼잣말을 한 적도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집에 계시는 부모님이 간식을 챙겨 주시면 부러웠다.
그러니까, 내가 어린 나에게 갖는 감정은 '부러움'보다는 '애틋함'일 것이다. 그 시절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어렸다는 이유로 나의 외로움에 고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또한 동시에 인정했다. 그 모든 감정이 나에게 스며들어 있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건 나를 잠에 빠져들게 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상냥하게 대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언젠가 나를 응원해 주었을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모르기에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나는 어린 나를 응원한다. 나는 너를 응원해, 너는 행복해질 거야. 물론 이 말을 수용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내가 이기적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너는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못 믿겠다면, 여기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계속 말해줄게. 나는 너를 응원해. 너의 행복을 바라.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라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할까. 그때는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나를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일까. 누구와 어떤 사이가 되고 어떤 언어를 주고받으며 무엇을 먹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들은 어떤 추억을 품은 채 미래의 나에게 전달될까. 궁금해진다.
내가 좋아했던 그 노래 가사처럼, 미래에도 추억은 있을 거잖아, 꼭 찾으러 가기야 약속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 언젠가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