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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7. 2024

아주 사소해 보이더라도

나는 송이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서 두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태어나서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당시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더라도 결국 정말로 잘하는 일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란 친구들이 지구 여기저기로 흩어져버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선물인지 몰랐을 때부터 그들은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어떤 음악이기도 했고, 귀여운 모양의 구름이기도 했고, 한 권의 책이기도 했고, 처음 본 사람의 미소이기도 했고, 다 녹아 가는 눈이기도 했다. 누군가 펼쳐 놓아 아파트 놀이터에서 말라 가는 오렌지 껍질에도 사랑스러움은 있었다.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은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나의 유년이었다.


 나는 멍 때리지 않는 아이였다. 멍 때릴 틈이 있으면 소설을 읽었고, 피아노를 쳤고, 그것도 아니면 상상을 했다. 침대에서 잠들기 직전까지 그날 본 영화의 뒷이야기를 상상했다. 그것이 나의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재능은 뭔가 더 굉장한 것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도라에몽의 도구 같은(어디로든 문 같은 건 너무 초인적이고, 암기빵 정도?) 비범한 능력을 갖춰야 천재라고 생각했던.... 깜찍한 고정관념이었다.

 어쨌든 나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탐색했고, 그 영향으로 나의 존재감은 흐렸다. 명랑하고, 열정적인 눈물을 흘리고, 다시 의기투합하는 주인공들을 많이 보았고, 촘촘하게 반짝이는 이야기 속 세계를 너무도 많이 접했다. 그 놀라운 재능에 매료되어서 내 마음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여기에 있을 틈이 없었다. 여기 없는 누군가를 쉴 틈 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재능이 늘 동경의 대상일 수만은 없었다. 그런 순수한 선망을 갖고 어른이 될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그것을 매일 느꼈다. 말주변이 좋은 애, 공부를 잘하는 애, 발표를 잘하는 애. 뭔가를 잘하고 돋보이는 애들이 많았다. 뚜렷한 색채가 있는 그들이 부러웠고 딱히 성과가 없는 내 재능은 초라해 보였다.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콕 집을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이었기에 나는 기약 없이 초조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공부하기, 친구 사귀기, 목소리 좀 더 크게 해 보기. 그러나 그런 날이 거듭될수록 허탈함만 쌓여 갔다. 무작정 걷다가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더 발전해야 할 것 같았고, 성장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치열한 낮을 다 보내고, 밤이 되어서야 급하게 글을 썼다. 말을 쏟아내듯 썼다.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그런 내가 밉고, 이런 상황에 진절머리를 내는 나와, 그러면서도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려는 내가 공존했다. 그런 생각은 휘갈겨 쓴 일기에 그대로 나타났다. 



 사실 이 고민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언제쯤 해답을 알게 될지, 애초에 해답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그런 것도 모르겠다.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무언가를 깨닫기에 나는 너무 어리니까. 그래도 이젠 천천히 일기를 쓰게 되었다. 그 애들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조금 약해졌다. 질투하는 마음을 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쓰면서 쌓아온 말들이 있고, 그 말들이 나를 전보다는 잡아 주는 것 같다. 어느 날 내가 일기에 써 놓고 스스로 감탄했던 말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나보다 다른 누군가를 먼저 좋아했던 내 마음은 나를 오만하지 않게 해 주었어.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은 가끔씩 꺼내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보다 진심이게 해 주었어. 다른 애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 애들의 좋은 점을 잘 찾는다는 거였어.'

 나의 불안과 방황은 이리저리 구르며 글이라는 모양이 되었다. 나에게만 있는 균열과 세계에서 나뿐인 기억은 나의 글이 되었다. 엄청나진 않더라도, 저녁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소박한 글이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재능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많은 의미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고, 다 가진다고 한들 안절부절못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은 제법 지치는 일일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예시를 들자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아이스크림이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 먹는가? 아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맛이 있고, 무슨 맛을 먹을까 고민해도 결국은 몇 개의 맛만 골라서 먹는다. 나는 '가치관'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내 시야는 아이스크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 소중한 것과 당신에게 소중한 것,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모두 각자의 맛이다. 그중 나는 초코 맛을 좋아할 뿐이다. 내가 초코 맛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맛이 볼품없는 것은 아니고, 만약 사람들이 모두 초코 맛을 싫어한다고 해도 내가 그런 이유로 내 취향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 각자 좋아하는 맛이 있고, 입맛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하고, 정반대인 사람을 만나면 흥미로워하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바람 통할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은은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 딱 그 정도. 

 재능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운동이나 말하기에 재능이 특출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의 재능은, 나의 반짝임은 야광별 같은 듯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의 캄캄한 방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그런 조용한 속삭임이 바로 내 재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재능이 있을 것이고, 그 모양도 다양할 것이다. 작열하는 재능, 쉬고 있는 재능, 멀리 퍼지는 재능, 소소한 재능, 화려한 재능, 조용한 재능, 비밀스러운 재능, 쾌활한 재능, 도약하는 재능, 준비하고 있는 재능...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다채로운 재능들이 있다. 나에게도 있고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비밀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네는 내 작은 야광별을 만난 것을 고맙게 여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야광별은 나의 언어이다.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단어를 배웠다. 파랑, 지혜, 이름, 사랑, 동경, 반짝임, 여름, 믿음, 리듬, 영원, 추억... 그런 단어를 모으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나는 자랐다. 누군가의 어휘를 탐내고 수많은 문장을 쓰고 지우며 나의 언어를 만들어 갔다. 덕분에 겨울밤에 공원을 산책하며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세상의 풍경을 나의 언어로 번역할 줄 안다. 나는 고작 나일뿐이지만 무려 나이기도 하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은 언어로 나의 글을 쓰고 또한 그 글을 다시 전하고 있다. 그거면 된다고 여긴다. 세상의 많은 아름다움과 무수한 맑음이 나에게 준 언어를, 이대로 소중히 여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애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대로 몰래 글만 쓴대도 괜찮다. 가슴 뛸 만큼 설레지는 않아도, 잔잔하게 전해져 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나를 찾아나갈 생각이다.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도중에 다른 맛도 먹어 볼 생각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진 못해도 나의 소중한 것에 마음을 다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 누군가에게 꼭꼭 눌러 편지를 쓰는 시간을, 내 삶에 계속해서 만들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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